현장 (승려)
현장(중국어:玄奘xuán zàng)은 중국 당나라의 고승(高僧)으로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하였다.
개요
현장은 이름 위(褘). 진혜(陳惠)의 아들.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동쪽에 있는 거우스현(緱氏縣) 출생. 10세에 뤄양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장안(長安) ·청두[成都]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떠났다. 도중 고창국(高昌國) 왕 국문태(麴文泰)의 대접을 받았으며,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는데,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와 파미르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야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한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를 저술하였다.[1]
생애
현장(玄奘, 602년 4월 6일 ~ 664년 3월 7일)은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번역가이며, 흔히 현장삼장(玄奘三藏)으로 불린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했고, 13세 때 승적에 이름을 올려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삼장법사인데,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해서 생긴 별칭이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 또는 629년에 인도의 푸슈야브후티로 떠났으며 645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사망할 때까지 만 19년에 걸쳐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중국의 승려들은 법에 의해 모여 살아야 했는데, 현장 승려는 여행을 했다.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에 이르는 현장 승려의 행로는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통행증을 내주고 위험한 길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627년 (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출발하여, 쿠차와 투르판 등의 서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행로를 거쳐 천축의 날란다 사원에 들어가게 된다.
현장의 저서는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라는 소설로도 각색되었는데, 그의 흔적인 쿠차와 투르판 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국문태의 초대를 받아 630년 2월경에 도착하여 1개월간 카라호자에 들러 이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했는데, 그때 법회를 열었던 건물은 복원이 되어 있다. 카라호자의 왕 국문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노잣돈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후 10여 년 유학을 끝내고 불경을 가지고 다시 카라호자에 들러 당나라로 귀환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현장법사의 모국인 당나라에 멸망한 뒤였고 사람들도 다 떠난 뒤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현장은 카라호자에 들르지 않고 바로 당나라로 귀환하게 된다. 그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며 당시 번역법이나 번역어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종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현장은 자신의 인도 여행의 견문기를 《대당서역기》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이 책은 당시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현장의 천축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시대에 《서유기》라는 소설이 생겼다.
삼장법사의 뜻
불경의 3요소, 즉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을 모두 통달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삼장'이라 함은 불교 경전, 종단의 계율, 경전과 계율을 다룬 논문을 통칭하는 것인데, 그 어마무시한 분량을 다 외우고 이해해야 삼장법사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현재도 삼장에 통달한 삼장법사는 매우 드물다. 불교를 국교로 하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삼장법사는 현재도 대단한 석학으로 존경받는다. 삼장을 배우고, 그리고 번역하고, 중국에 전파하기 위해, 또는 불경 원문을 구하고 공부하기 위해 서역 천축국으로 떠나서 결국 성취를 하고 돌아온 승려들은 당대에도 대단한 학식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삼장법사로 가장 알려진 사람은 당나라 당태종 시절의 유명한 고승인 현장법사이다. 중국을 떠나서, 서역까지 여행하고, 다시 수 년~수십 년간 현지에서 공부를 한 뒤, 다시 중국으로 와야 했으니, 당시에는 그냥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긴 여행이었다. 실제 현장은 불경 원문을 들고 중국으로 돌아와 한문으로 번역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삼장법사 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현장법사'를 떠올린다. 반대로 서역의 사람이 중국으로 와서 중국말을 배워 불경을 번역한 경우도 있다. 현장보다 몇 백년 앞선 시대의 사람인 쿠마라지바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두 사람은 각각 불경을 탁월하게 번역해 냈는데, 지금까지도 쿠마라지바의 번역과 현장의 번역이 불교 경전 한문 번역의 표준으로 꼽힌다.
동아시아에서 삼장법사라면 『대당서역기』의 저자인 현장을 떠올린다. 이는 『삼장법사전(三藏法師傳)』의 주인공이 현장이고, 현장의 구법 여행을 소설화한 『서유기』에도 '삼장법사'의 칭호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삼장법사는 현장 이전부터 인도 불교경전이 동아시아로 전해지면서 소개된 말이다. 삼장법사는 인도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수백 년에 걸친 경전 번역과 그리고 번역된 경전의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던 승려들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대한민국 승려들도 스리랑카와 태국 등지로부터 삼장법사 칭호를 수여받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전통적인 의미로서 삼장에 대한 암송 능력과 정통한 이해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국내 불교단체에서는 일정한 불교 공부 과정을 이수하면 승려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삼장법사 칭호를 수여하는 경우도 있다.
천축국으로의 여정
629년(혹은 627년), 현장은 용단을 내렸다. 출국을 엄격히 금했던 당나라 황실의 명령을 어기고, 서역을 통해 천축국으로 향했다. 다른 여러 승려들과 함께 황실에 몇 차례 출국 허가를 청하였지만 불허되었다. 그럼에도 현장은 홀로 출국을 강행했다. 진리에 대한 갈구가 컸던 것인지 혹은 젊은 승려의 간이 컸던 것인지, 국법은 크게 여의치 않고 옥문관(당시 당나라 서쪽의 마지막 관문)을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불심이 깊었던 양주의 관리자 '이창'은 현장이 불법출국을 할 것이라는 첩보를 받고서도 이 것이 구법여행임을 알고 눈감아 주었다.
현장에게 두려웠던 것은 오히려 여행길이었다. 메마른 사막을 횡단해야 하고, 하늘에 맞닿은 설산을 넘어야 했다. 도처에 산짐승이 즐비했으며, 강도나 산적은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략적인 지도나 애매한 글로 남겨진 정보만 믿고 수 만리 길을 가야 했다. 모든 것이 여행 초보자로서 첫 도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장안에서 '하홍달'이라는 유명한 점쟁이로부터 점을 보았는데, "붉고 야윈 늙은 말을 타고 사막을 건너갈 것"이라는 점괴를 받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옥문관을 나서기 직전, 한 늙은 노인이 늙고 야윈 말을 추천하며, "지금 그 말은 어려서 긴 여행을 못 버틸 것이다. 대신 이 말은 열 다섯 번도 넘게 사막을 횡단한 말이니 이 말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현장은 점쟁이의 말과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가지고 있던 젊은 말과 늙은 말을 바꾸기로 했다. 아마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미신이라도 믿고 싶었던 듯하다.
현장은 고창(Gaochang)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현장은 여행을 성공할 수 있게 해 준 큰 은인을 만났다. 바로 고창의 왕이었다. 불심이 돈독했던 고창왕은 현장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왕은 밤낮으로 현장의 법문을 청했고, 심지어 현장에게 고창의 국사가 되어달라며 길을 떠나지 못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목표가 명확했던 현장은 왕의 청을 거절했다. 대신 1개월간 고창의 사람들에게 불법을 강의하고, 천축에서 돌아오는 길에 3년간 체재하며 머무르기로 약속했다. 훗날 현장은 천축에서 돌아올 때, 이 약속을 지키고자 일부러 육로로 돌아왔는데 그때 고창은 이미 망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왕은 현장이 풍족한 여행을 할 수 있게 지원했다. 황금 100냥, 은전 3만 매, 비단 500 필, 말 30 필, 25명의 일꾼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20년간 풍족한 여행을 하여도 충분한 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있는 24개 나라의 왕들에게 길을 잘 통과하고 여행을 도와주도록 각각 서신을 써주었다. 덕분에 현장의 여행은 밀출입국자의 여행에서 국빈의 여행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현장은 사막의 오아시스 국가들과 서돌궐의 통치자들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으며 여행길을 계속했다. 천 개의 석굴이 있는 카라샤르(Karashahr), 쿠마라지바가 태어난 곳이자 키질 석굴로 유명한 쿠챠(Kucha), 오아시스 도시 악수(Aksu)를 거치며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길을 나아갔다. 이어 눈으로 뒤덮인 천산산맥을 넘었다. 가장 높은 한텡그리(Khan-Tengri) 봉은 높이가 7,000m가 넘었다. 눈사태와 추위 배고픔으로 일행 중 10중 3-4는 목숨을 잃었다. 얼지 않는 호수 이식쿨(Issykkul)에서 휴식을 취하고 서돌궐의 대 칸을 만났다. 대 칸은 고창왕의 편지를 가져온 현장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현장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고창왕이 했던 것 처럼 구법 여행을 만류하였지만 현장은 그의 결심을 보이며 거절하였다.
현장은 대 칸의 소개장과 지원을 받고 여행을 이어나갔다. 타슈켄트(Tashkent), 사마르칸트(Samarkant), 테르메즈(Termez)를 지나 쿤두즈(Kunduz)까지 각지의 왕들을 만나며 환대받는 여행을 계속했다. 이들이 서돌궐의 휘하에 있는 왕국들이었기도 했지만, 왕들과의 인맥이 점점 쌓아가면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예를 들어 쿤두즈의 국왕은 현장을 특히 좋아했던 고창왕의 매부였고, 고창왕의 친서를 들고 방문하였으니, 현장에 대한 대접은 단순한 방문객 수준이 아니었다. 현장은 카시피(Kapisi) 평원을 지나 천축의 초입, 간다라에 도착했다. 간다라 지역에서는 잘랄라바드(Jalalabad), 페샤와르(Peshwar), 다렐(Dalel), 훈드(Hund), 탁실라(Taxila)를 거쳐가며, 주요 스투파와 유명한 불교 성지들을 하나씩 방문하며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대당서역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당(唐)나라 때의 지지(地誌). 현장(玄奘) 저술. 646년에 완성. 현장이 16년간에 걸친 구법여행(求法旅行) 동안에 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에서 견문한 것을 귀국한 후에 태종황제(太宗皇帝)의 명으로 저술한 것이다. 소개된 나라 수는 현장이 직접 가본 곳과 간접적으로 들은 곳을 합하여 138개국이나 되며, 각 나라의 풍토 ·산물 ·정치 ·풍속 ·전설이 전해지고, 불사(佛寺) ·불승(佛僧)의 수, 불탑 ·성적(聖蹟)의 유래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서구의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학술탐험의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이 책의 연구에는 혜립(慧立)이 지은 《자은사삼장법사전(慈恩寺三藏法師傳)》을 아울러 연구하는 것이 좋다.
현장묘 탑
창안 현장묘탑(長安 玄奬墓塔)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창안현(長安縣) 사오링위안(少陵原)의 싱자오사(興敎寺) 경내에 있는 전탑(塼塔). 싱자오사탑[興敎寺塔] 또는 현장영탑(玄奘靈塔)이라고도 한다. 669년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 현장(玄奬)의 유골을 묻기 위하여 건립되었고, 828년 문종(文宗) 때 복구사업이 이루어졌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푸른 벽돌로 쌓은 4각형의 누각식(樓閣式) 전탑으로서 모두 5층이며, 전체 높이는 21m이다. 기단부(基壇部)의 각 변의 길이는 5.2m이다. 1층 탑신의 남쪽에 아치형 문이 있고, 문 안쪽의 감실(龕室)에 현장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탑 외부는 각 층마다 8각형의 기둥을 쌓았으며, 각 면마다 3실(室)과 4개의 기둥이 있다. 처마 밑에는 벽돌로 간결하게 두공(斗拱)을 올렸는데, 이 같은 기법은 다른 건축물에서는 보기 드물다. 탑 처마는 내쌓기를 하여 밖으로 내밀게 하였으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내밀어진 부위가 짧다. 전체적으로 건축기법과 표현수법 면에서 목조건축을 모방한 누각식 전탑의 전형(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탑 양옆에는 이보다 규모가 작은 탑이 하나씩 세워져 있는데, 현장의 제자들인 규기(窺基)와 원측(園測)의 묘탑이다.
쉬안장사
쉬안장사(玄奬寺)는 타이완(臺灣) 중부 난터우현(南投縣)에 있는 사찰이다. 당나라 명승이며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모델이기도 한, 현장(玄裝)법사와 그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교사원이다. 르웨탄호(日月潭, 해발고도 870m) 남쪽의 청지산(山) 위에 있으며, 현장의 사리는 3층에 봉안되어 있다. 현장법사의 사리는 원래 중국 난징에 있었으나, 중국전쟁 중에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전쟁이 끝난 뒤 타이완으로 반환되어 이곳 현장사에 옮겨졌다. 현장사에서는 승려가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주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도 많다.
평가
현장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호칭은 '삼장법사'이다. 삼장이란 부처님의 말씀(경장), 불교의 계율(율장), 경과 율의 주석서(논장)에 통달한 '승려'에게 부여되는 별칭으로,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학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이 평생을 통해 이룩한 불교적 성취를 돌아보면 그를 삼장이라는 별칭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현장을 정의하는 또 다른 직업은 '여행가'이다. 그는 세계적인 여행가 이븐 바투타, 마르코 폴로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놀라운 여행을 했다고 평가된다. 629년(혹은 627년) 중국을 출발하여 서역을 거쳐 인도 전역을 둘러보고 645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행은 현장이 직접 작성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동시대를 살았던 혜립(慧立) 스님과 언종(彦悰) 스님이 현장의 일생에 대해 남긴 '자은전(慈恩傳)'에서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이 기록물들은 단순히 여행기에 그치지 않고, 지리지 혹은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게다가 여정 중 그는 일반 여행객이 아니라 훌륭한 '외교관'급의 성취를 얻었다. 수많은 통치권자들을 만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인도에서는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 등 수많은 사상가들과 논쟁을 통해 당대의 철학적 사유를 크게 발전시킨 '철학자'였다.
현장은 귀국길에 520상자의 불경을 당나라로 가져왔으며, 평생을 번역에 매진하여 1338권의 불경들을 번역하는 한편으로 후학들도 교육했다. 그의 놀라운 성취는 그가 입적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져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동영상
각주
- ↑ 〈현장(玄奘,602?~664)〉, 《두산백과》
참고자료
- 〈현장(玄奘,602?~664)〉, 《두산백과》
- 〈현장〉, 《위키백과》
- 〈삼장법사〉, 《나무위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