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
주자(중국어:朱子zhū zǐ)는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개요[편집]
주자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格物)'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 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1]
주자의 생애[편집]
주희(朱熹, 1130년 10월 18일 ~ 1200년 4월 23일)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 주부자(朱夫子), 주문공(朱文公) 송태사휘국문공(宋太師徽國文公)이라는 존칭이나 봉호로도 불린다.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 여러가지가 있다. 시호(諡號)는 문(文), 휘국공(徽國公)이다. 송나라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공자, 맹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정호, 정이 등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참뜻을 밝히고 성리학(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자는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주자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瑳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학문을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 하는데, 고대 경전의 주해 외에 유교의 주류인 이기심성(理氣心性),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설을 제창하여 그 학문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주역본의계몽(周易本義啓蒙)·시집전(詩集傳)·대학중용장구혹문(大學中庸章句或問)·논어맹자집주(論語孟子集註)가 있고, 소편(所編)에는 논맹집의(論孟集義)·중용집략(中庸集略)·효경간오(孝經刊誤)·소학서(小學書)·통감강목(通鑑綱目)·근사록(近思錄)·주자집(朱子集) 등을 남겼다. 1200년에 졸하니 사망 당시 향년 71세였다. 송 영종 때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송 이종 연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신국공(信國公)으로 추봉되었다가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고쳐 봉해졌고 문묘에 배향 종사되었다.
주자학[편집]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학의 주류 학파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정이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시대 유학이란 뜻에서 송학(宋學), 송나라와 명나라에 걸친 학문이라고 해서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시대 이전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새로운 기풍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新儒學), 정호(程顥)와 정이(程頥)에서 주희로 이어지는 학통이라는 뜻에서 정주학(程朱學),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 정주 이학(程朱理學)으로도 불리고,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특히 중화권에서는 송명리학(宋明理學), 서구권에서는 신유학이라고 주로 칭한다.
학문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수양, 수기)를 위한 학문)이다. 주자의 학문은 북송에서 일어난 신경향의 학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또 사서를 특별히 중요시하여 주석을 하였고, 《대학》의 〈성의〉(誠意)장의 주해는 죽기 3일 전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 주자학이 송대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다. 주자학은 주자의 생전에 있어 지방관적, 재야적(在野的) 입장에서의 사상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元)·명(明)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관학적(官學的)인 아카데미즘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주자학은 조선이나 일본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자의 저서[편집]
주자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다.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주자의 사상[편집]
이기론(理氣論)은 우주 만물의 구조를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이기론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이와 기가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 이는 만물을 낳는 근본 원리를 말하며,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를 말한다. 주자는 모든 사물이 이와 기의 결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理氣不相離), 동시에 원리로서의 이와 재료로서의 기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일 수 없다(理氣不相雜)고 보았다. 주자는 모든 사물은 이(理)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의 측면에서는 똑같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만물이 서로 다른 것은 기(氣)의 맑고 흐림 또는 바르고 치우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심성론(心性論)은 이기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적 구조와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심성론에 따르면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心統性情]. 성이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치(理)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눌 수 있다. 본연지성은 기질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선한 것이고,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본연지성은 동일하지만 기질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질지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정은 성이 외부의 사물에 감응(感應)하여 나타난 감정으로 사단과 칠정을 말한다.
거경궁리론(居敬窮理論)은 도덕을 실천하여 인격적으로 완성된 군자나 성인이 되는 방법에 관한 이론이다. 주자에 따르면 순선한 본연지성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본연지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수양이 필요하다. 그는 이를 위해 먼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참모습을 밝게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格物致知). 그래서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먼저 알아야 그에 맞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하였다. 주자는 이와 더불어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함양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살펴 경계해야 한다(存養省察)고 주장하였다. 주자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은 천리를 보존하고 이기적 욕망을 제거하여(存天理去人欲) 이상적 인간이 될 수 있다.
경세론(經世論)은 세상을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이론이다. 주자는 자신을 먼저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원리에 근거하여, 수양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닦는데 그치지 않고 제도·법률·생산 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문제까지도 적극적으로 해결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기이원론과 태극도설은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의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 원리로서 태극(太極)을 제시한다.
주자가례[편집]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주자가 유가(儒家)의 예법의장(禮法儀章)에 관하여 상술한 책이다.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한다. 5권. 부록 1권. 그러나 이것은 후인(後人)의 의탁(依托)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에 전해진 것은 고려 말 주자학과 함께 전래되었다. 그 뒤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위의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여기에 의절고증(儀節考證)·잡록(雜錄)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만들었다.
관(冠)·혼(婚)·상(喪)·제(祭)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로서의 이 《주자가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되면서 그 준행(遵行)이 강요되어 처음에는 왕가와 조정 중신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다시 일반 서민에까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루어진 이 가례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아 많은 예송(禮訟)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주자학과 함께 조선이 세계문물에 뒤지는 낙후성(落後性)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예학(禮學)과 예학파의 대두는 예와 효(孝)를 숭상하는 한국의 가족제도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가례증해[편집]
가례증해(家禮增解)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이의조(李宜朝)가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보충하고 해설한 책. 목판본. 9권 10책. 1824년(순조 24) 간행하였다. 규장각도서. 이의조의 부친이 주자의 《가례》를 바탕으로 하여 고금의 예설(禮說)을 수집한 것을 다시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인사(人事)는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나 가례는 변질될 수 없는 가치관과 의의를 가진다고 보고, 시대에 따라 변질되고 의의가 달라진 변례(變禮)를 인용하고 고례(古禮)의 본질을 상세하게 해설하였다. 송환기(宋煥箕)의 서(序)와 정만석(鄭晩錫)의 발문이 있다.
가례부췌책판[편집]
가례부췌책판(家禮附贅冊板)은 조선 선조(宣祖) 때 학자 안신이 주자(朱子)의 《가례》에 설명을 붙인 책이다. 1990년 1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28년(인조 6) 간행된 필사본으로, 6권 1책이다. 규장각도서이며 저자의 후손인 안경현(安景賢)이 편찬하고 안정복(安鼎福)이 교정하여 서문을 썼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대개가 정조(正條)로 되어 있으나, 조목(條目)이 매우 간략하여 학자들 사이에 해석이 각각 다르고 의심스러운 곳이 많아, 제가(諸家)의 주설(註說)만도 수십 가지였다. 저자가 가례에 관한 선배 유학자들의 주해(註解)를 간략하게 모으고 당시 왕실에서 행한 예제(禮制)에 민간의 예식(禮式)을 더하였다.
제1권에는 통례사당(通禮祠堂)·부체별록(附贅別錄)·거가잡의(居家雜儀), 제2권에는 관례(冠禮)·혼례(婚禮)·견구고례(見舅姑禮), 제3권에는 상례(喪禮), 제4권에는 상례치장(喪禮治葬), 제5권에는 상례노제(喪禮路祭)·졸곡(卒哭)·소상(小祥)·대상(大祥)·치부존장(致賻尊狀), 제6권에는 제례사시제(祭禮四時祭)·묘제(墓祭)등으로 나누어 실려있다. 영조 34년(1758)에 이를 간행하고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의 발문을 얻었으나 당시에 간행하지 못하고 광무 3년(1899년)에 그의 10세손 안상진(安尙鎭)에 의해서 간행된 것이 현재의 책판(冊板)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주자(Zhu Xi,朱子,1130.10.18.~1200)〉,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주자(Zhu Xi,朱子,1130.10.18.~1200)〉, 《두산백과》
- 〈성리학〉, 《위키백과》
- 〈주희〉, 《위키백과》
- 〈주자(철학자)〉, 《나무위키》
- 감동공부, 〈성리학 유학 주자학 흐름 한눈에 정리〉, 《나무위키》, 2023-02-06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