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제갈량

위키원
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7일 (토) 16:39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제갈량

제갈량(중국어:诸葛亮zhū gě liàng)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이다. 제갈공명이라고도 부른다. 제갈량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개요[편집]

제갈량은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1]

제갈량의 생애[편집]

제갈량(181년 ~ 234년 10월 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 정치인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자를 포함해서 제갈공명이라고도 한다. 서주 낭야국 양도현(陽都縣) 출생이다.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 시호는 충무(忠武). 작위는 무향후(武鄕侯). 후한 말 군웅인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제업을 이루었다.

제갈량은 난을 피해 형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양양(襄陽) 인근의 융중이란 마을에서 학문(學文)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양보음(장송곡의 일종)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시 형주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또 그는 양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였다. 그 결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제갈량의 친형은 제갈근(諸葛謹)이고, 누나 2명, 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다. 15세가 되기 전에 부친과 모친이 돌아가셔서 한동안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은 후 조조가 서주대학살을 일으켰고 제갈씨 가문은 이때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형인 제갈근은 강동으로 내려간 뒤 손권의 가신으로 들어가서 생계를 책임지기로 하고 제갈량이 가문의 당주가 되어 일족들을 이끌고 형주로 피난갔다. 이 일로 인해 제갈량은 손권에게는 매우 우호적인 성향이 된 반면 조조와는 불구대천이 되었다.

형주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을 보좌하여 촉한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하였다. 선주가 죽고 후주가 즉위하자, 승상(丞相), 녹상서사(錄尙書史), 익주목(益州牧) 및 사례교위(司隸校尉)를 겸하며,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2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서 실권을 행사하였다.

223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雍闓), 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어 고정이 초황을 살해하고, 옹개 역시 태수 정앙을 죽이고 후임 태수 장예를 잡아 오로 보냈으며 주포는 파견 나온 종사 상기를 살해하여 난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중국 역사상 지략과 충의의 전략가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위나라 토벌을 시작하면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우허우무[편집]

우허우무(武侯墓)는 중국 산시성(陕西省) 한중(汉中)에 위치한 제갈량의 묘이다. 몐셴청(勉县城) 남쪽 4㎞ 지점의 딩쥔산(定军山) 아래에 있다. 중국 역사상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 삼국시기의 승상(丞相)을 지낸 제갈량(諸葛亮)의 진묘(真墓)이다. 묘지 전후에 다뎬(大殿), 둥샹팡(东厢房), 시샹팡(西厢房), 베이위앤궁팅(北院宫厅), 난위앤다오관(南院道观), 바이뎬(拜殿), 충성츠(崇圣祠),허우펀팅(后坟亭)이 세워져 있다. 전형적인 한나라의 묘(墓) 형식이다. 묘 옆에는 두 그루의 계수나무가 마치 무덤을 지키는 호위병처럼 서있는데, 이를 '후무솽구이(护墓双桂)'라고 부른다. 높이가 19m, 직경이 1m 이상이며 삼국시대에 심은 것이다. 우허우무(武侯墓)에서 2㎞ 떨어져 있는 딩쥔산(定军山)은 삼국시기의 유명한 전쟁터로 제갈량이 이곳에서 군대를 훈련시켰다.

제갈량집[편집]

제갈량집(諸葛亮集)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제갈 량(181∼234)의 저서이다. 제갈 량이 편찬한 책으로 《제갈충무후문집(諸葛忠武侯文集)》 《제갈승상집(諸葛丞相集)》이라고도 한다. 4권으로 이루어진 이 문집은 진수가 편정(編定)한 것은 없어지고 명(明)·청(淸)나라 때 다시 편집되었다. 문집은 제갈 량의 정치사상과 군사사상을 담고 있다.

정치사상으로 첫째, 기강을 세우고 상하 화합해야 한다. 둘째, 널리 보고 들으며 충간을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현재(賢才)를 천거하고 백성을 안정시켜야 한다. 넷째, 법령을 분명히 하고 상벌을 엄격히 해야 한다.

군사사상으로 첫째, 군대의 기초는 사병에 있다. 둘째, 군기를 엄격히 해야 한다. 셋째, 훈련을 엄격히 해야 한다. 넷째, 힘을 헤아려 병사를 사용하고 유비무환 해야 한다. 다섯째, 실(實)을 피하고 허(虛)를 공격해야 한다.

출사표[편집]

《출사표》(出師表)는 원래 신하가 적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표문(表文)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중국 삼국 시대의 촉한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제갈량의 출사표로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았다는 이가 없다 할 정도로 빼어난 문장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 담겨 있는 글로 오늘날까지 크게 칭송받고 있다.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재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날 때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촉한(蜀漢) 제1대 황제 유비(劉備)는 위나라 땅을 수복하지 못하고 죽었으며, ‘반드시 북방을 수복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를 끌고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나는데, 떠나는 날 아침 촉한의 제 2대 황제 유선(劉禪) 앞에 나아가 바친 글이 출사표라 전해진다.

출사표에는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고, 각 분야의 현명한 신하들을 추천하며, 유선에게 올리는 간곡한 당부의 말이 담겨 있다. 전후 두 편인데 전편은 227년 작이고 후편은 228년(?) 작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제갈량전(諸葛亮傳)>, 《문선(文選)》 등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출사표는 진(晉)나라 이밀(李密)이 무제에게 올린 진정표(陳情表), 당(唐)나라 사상가 한유가 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함께 중국 3대 명문 중 하나로 꼽히며, 예로부터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충신이 아니라 하였다.

제갈량에 대한 평가[편집]

제갈량은 충심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상적인 신하의 대명사로서 항상 인기인이었으며, 그 덕에 오래 전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북벌을 실패하고 주군의 대업인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기에 그에 따라 비판 역시 없진 않았으나 당대부터 현대까지 고금의 쟁쟁한 인사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은 중국 정치인이 존경받을 수 있는 모든 특성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현명하고, 충직하고, 공정하고, 웅변적이고, 기발하고,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른 모든 기록된 업적보다도 제갈량을 존경의 대상으로서 완벽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의 평생의 사업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비판적인 관점도 있다. 제갈량과 그의 후계자들은 남방에서 그들의 일반적 권위에 만족했고 그들이 습득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그들의 노력을 북방에 집중했고, 헛된 공격 속에서 그들의 제한된 힘을 소진했다. 촉은 지방의 군벌적 사업체일 뿐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또한 228년 봄 제갈량의 1차 북벌 실패는 수 세기 동안 중국의 역사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과 평론을 받았다. 그의 군사적 행동은 대조적인 평가를 보인다. 전장에서 그는 전술적 능력과 유연성을 보여 주었지만, 전역의 목적과 전략적 목표를 둘러싼 모호성은 당혹스럽다. 제갈량의 대담하고 날카로운 지정학적 분석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소극적인 접근은 실망스럽다. 그는 군사 조직과 행정의 대가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그의 승리를 방해한 눈에 띄고 일관된 병참 병목 현상은 이러한 평판을 퇴색시킨다. 그는 자신이 손자의 제자라고 주장하지만, 헛되고 잦은 전쟁으로 나라를 약화시키지 말라던 손자의 훈계를 무시한 것처럼 보인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제갈량(諸葛亮,181~234)〉,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제갈량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