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정화(중국어 : 郑和, zhèng hé)는 중국 명나라의 환관 겸 전략가이다. 거대한 남해원정단을 이끌고 동남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케냐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였다.
개요[편집]
정화는 정난의 변 때에 공을 세워 연왕이 영락제(永樂帝)로 등극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큰 키에 체격이 담대하였으며 성격이 활달한 장군이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조카 혜제가 죽지 않고 해상에 숨어들었다고 의심한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후 7회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스와힐리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여 수많은 외교사절이 왕래하였고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열대지방의 보석, 동물, 광물 등을 교환하여 중국으로 가져와 무역상의 실리를 획득하였다.[1]
생애[편집]
정화(1371년 ~ 1434년)는 중국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將軍)이자 환관, 무관(武官), 제독(提督), 전략가, 탐험가, 외교관, 정치인이다. 윈난성(雲南省:운남성) 쿤양(毘陽:곤양) 출신으로 명나라 성조 영락제 때 시작된 남해(南海) 원정의 총지휘관이다. 본래의 성은 마(馬)씨, 본명은 마화(馬和)이다. 법명은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 또는 三寶太監)이라 불린다.
정화는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운남성(雲南省) 곤양(昆陽)의 무슬림(이슬람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씨인 마 씨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 합지도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를 순례한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인 하지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칭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하여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때 운남성 개발에 노력했던 색목인 정치인 사이드 아잘 샴스앗딘이었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 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염두에 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382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원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운남성을 공격할 때, 소년 정화는 붙잡혀 거세된 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헌상되었다. 명태조 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의 變) 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20년 동안 환관으로 일하면서 연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최고의 고문관이 되었다. 1399∼1402년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으며, 연왕이 조카 혜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정화는 영락제(永樂帝)의 심복으로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였고, 가장 멀리까지 도달한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현재의 케냐 말린디)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寶船)은 전체 길이가 120m가 넘는 대형 선박이었다고 한다. 당시 선단의 대선이었던 보선(寶船)의 규모는 길이가 137m, 선폭이 56m이고 9개의 돛대가 달려 있었으며 배수량은 약 2700톤으로 추측된다. 1957년 난징에서 거대 방향 키가 발견됨으로써 정화가 이끈 원정단의 대형 선박의 존재가 사실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1405년 소주를 출발한 제1차 원정 때에는 보선만 62척이었고 장병 2만 7800여 명이 분승하였으며 선단은 총 317척으로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들을 물리치고 인도 서안의 캘커타까지 도달하여 진국(鎭國) 비를 건립하였다.
마지막 원정이었던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宣德帝)때인 1431년, 제7차 원정 때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들렀으며 아프리카 케냐의 스와힐리 해안까지 항해하였다. 정화 함대의 원정으로 중국인들은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화교(華僑)의 수적인 증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의 인도양 진출은 1492년 콜럼버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서는 것이었으나 문신들의 환관에 대한 강력 견제에 부딪혀 원양선이 제거되고 무역이 금지되면서 더이상의 해양개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화는 1433년 마지막 원정을 끝낸 이듬 해에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무덤은 난징에 위치하고 있다.
대원정[편집]
하서양(下西洋)은 1405년과 1433년 사이에 걸쳐 일어난 7번의 탐험 원정이다. 영락제가 1403년에 함대의 건설을 명했고, 이 함대는 환관 정화의 지휘를 받아 남중국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의 해안까지 다녀오는 성과를 올렸다. 7번의 원정들 중 6번은 영락제의 재위 시기에 행해졌고, 나머지 1번은 선덕제의 재위 시기에 일어났다. 첫번째 원정부터 세번째 원정까지는 인도의 캘리컷까지 항해한 후 돌아왔고, 네 번째 원정은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까지 갔다. 이후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동부까지 항해한 이후 명나라로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원정에 사용된 함선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엄청난 양의 보물들을 싣고 있었다. 이 보물들은 중국의 부와 권력을 타 지방에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그들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를 원하는 지역 지도자들의 대사들을 귀환할 때 함께 데리고 갔다. 이 원정 동안 그들은 팔렘방 지역의 해적 함대를 소탕했고, 명-코테 전쟁에서 스리랑카의 알라케쉬바라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웠으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의 군사 세력들을 진압하였다. 이때 일어난 명나라의 군사 원정으로 인하여 많은 나라들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으며, 명나라는 더욱 강력한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을 세계 곳곳에 미칠 수 있었다. 또한 해적 소탕과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명나라 함대는 해상을 평화로이 만드는 데 일조하였기에, 주변 나라들의 교류가 더욱 원활해졌으며 명나라의 위상은 덩달아 높아졌다.
정화의 원정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의 지지는 황제의 총애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강했다. 게다가 과거 시험을 통해 올라온 명나라의 전문 관료들은 이 귀족들에 대단히 배타적이었고, 대규모 원정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후 선덕제가 즉위하고 관료들이 핵심 권력을 잡자, 귀족들은 황제의 신임을 잃었고 더 이상 대규모 원정을 주장할 정도의 세력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 원정이 중단되자 경제의 중앙집권화는 더욱 강해졌는데, 원정으로 인하여 대규모 흑자를 보던 지역의 호족들과 관리들이 더 이상 이에서 이익을 창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를 깨달았고, 황권 강화를 위해 더더욱 원정대 파견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이 원정은 15세기에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당시 동쪽과 남쪽 해안을 지킬 정도의 상당한 해군력이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다만 현재도 이 원정의 실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대원정의 이유는 찬탈이란 수단을 이용하여 즉위한 영락제가 국내의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 타국의 조공을 많이 받아 유교적 성왕이란 모습을 연출하여 스스로 계승의 정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작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중국 함대가 남중국해와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패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여러 나라의 조공을 촉구하여 궁정에서 사용하는 해외의 사치품을 입수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신 등의 기록을 보더라도 여러 나라의 물물과 통상교역에 대한 사정에 관심을 기울인 것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동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원정이자 대항해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후세에 삼보태감으로 불리며, 사마천 및 채륜 등과 함께 환관의 영웅으로 이야기 되었다. 또 정화가 머물렀던 각지의 항에서도 정화에 대한 평판은 높아 자바와 수마트라, 태국에서는 삼보묘가 건립되어 그에 대한 제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또한 정화 함대는 당초부터 말라카 해협에 건국된 말라카 왕국을 인도양 항해를 위한 근거지로서 중시하여 말라카 국왕을 우대하였다. 그 때문에 말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의 보호에서 성장하여 중국 함대의 항해가 단절된 뒤에도 동서교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정화(Admiral Cheng Ho,鄭和,1371~1433?)〉,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정화(Admiral Cheng Ho,鄭和,1371~1433?)〉, 《두산백과》
- 〈정화 (명나라)〉, 《위키백과》
- 〈정화의 대원정〉, 《나무위키》
- 〈정화(명나라)〉, 《나무위키》
- 어부지리, 〈중국, 명나라 정화 항해〉, 《네이버블로그》, 2023-03-01
- 애니덕후 한일러, 〈명나라의 탐험가 정화(鄭和)〉, 《네이버블로그》, 2022-11-27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