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쑨원

위키원
Jinshi2068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10일 (화) 09:36 판 (새 문서: 썸네일|300픽셀|'''쑨원''' '''쑨원'''<!--손중산-->(중국어:孙文{{발음|孙文}})은 중국 혁명의 선도자·정치가이며 그...)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쑨원

쑨원(중국어:孙文sūn wén)은 중국 혁명의 선도자·정치가이며 그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三民主義)로 대표된다.

개요[편집]

쑨원은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쑨원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ㅍ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

이름[편집]

쑨원의 본명은 덕명(德明)인데, 이후 스스로 문(文)이라 이름을 바꿨다. 공자가 존경한 고대 문명국 주나라의 초대 왕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가 문왕(文王)이며, 중국은 옛날부터 암암리 중국 문화의 계통을 상징적으로 문왕 → 주공 → 공자로 이어진다 생각하였다. 문(文)이란 글자는 아무한테나 올리지 않는, 중국에서 최고의 시호였다. 따라서 이름을 문으로 바꿨을 때부터 자신이 새로운 공화국 문명의 시조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병음으로는 쑨원(Sūn Wén), 쑨원의 모어인 광동어로는 쉰만(syun1 man4). 호(號)는 중산으로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인 나카야마(中山)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광둥성의 중산시는 여기서 따서 붙인 지명이다.

쑨원은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손중산(孫中山)이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있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저우에서 1895년 30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 樵(나카야마 키코리, 나카야마 사코노, 중산 차오, 중산 초)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하였다. 영미권에선 쑨원의 호 일선(逸仙)의 광둥어식 발음 얏센(Yat-se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쑨얏센(Sun Yat-sen)은 중국의 광저우시에 있는 중산대학의 영어 명칭 Sun Yat-sen University로도 쓰인다. 또 대만의 가오슝시에 있는 국립 중산 대학의 영어 명칭도 National Sun Yat-sen University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한자음인 손문으로 잘 알려졌다.

생애[편집]

쑨원(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인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의 창립자이다. 쑨중산(孫中山)·쑨이셴(孫逸仙)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청나라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1895년 광주(廣州)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쑨원의 자는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홍콩으로 이주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청나라가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기 위해 베이징을 정복할 북벌군을 조직해야만 했다.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타협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하여 국민당을 설립하였고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였지만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되었다.

쑨원은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의 대중성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장병을 양성하고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 12일 베이징(北京)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에 묻혔다. 그의 시신은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입관 끝에 장제스가 1928년 북벌에 성공한 직후인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사후 43년 만인 1968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삼민주의[편집]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이 발표한 초기 중화민국 정치 강령으로,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뜻한다. 삼민주의는 건국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화민국 정치사상이다.

1905년, 쑨원(1866년-1925년)은 중국동맹회가 창성되었을 때, 동맹회의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서 "驅除韃虜(만주족 축출), 恢復中華(중화 회복), 創立民國(민국 창립), 平均地權(토지 소유의 균등)"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채택한 바 있다. 1906년 무렵, 이 네 가지 내용을 삼민주의로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쑨원은 삼민주의를 수정하고 발전시켰고, 이의 설파에 노력하였다.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16회에 걸쳐서 삼민주의의 강연을 한 바 있고, 쑨원이 1925년 병사함에 따라 민생주의의 부분이 미완의 전개로 끝났지만, 그의 강연 내용은 "삼민주의"에 정리되어서 출판되었다.

중국국민당[편집]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은 중화민국의 정당으로, 이전의 중화혁명당(1914)을 근대적 정당으로 개편해 1919년에 창당하였다. 1928년부터 2000년까지는 중화민국의 유일 집권 정당이었으나 2000년에 민주진보당에게 대권을 내주었고, 현재도 중화민국 입법원에서 제1 야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과거 집권 여당이었으나 두 번째 정권교체를 한 차이잉원이 집권을 하게 되면서 야당으로 변했다. 보수주의 정당으로써 현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을 견제하는 야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정당이다.

중국국민당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주요 세력들 중 하나인 중국동맹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11년에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쑨원과 쑹자오런 등이 동맹회를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였고, 초기에는 쑨원이 임시 총통이었으나 이후 위안스카이 장군에게 총통직을 이임하였다. 1916년에 위안스카이가 세상을 떠나자, 중국 대륙에서는 군벌들이 각기 할거하는 군벌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에 쑨원은 장제스를 시켜 북벌을 실시, 대륙 대부분을 장악하고 난징에 정부를 세웠다. 장제스가 주도하던 중국국민당은 타이완으로 국부천대한 이후에도 1인 독재를 계속하였고, 중화민국은 1971년까지 UN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하였다. 1990년대부터 리덩후이 총통이 등장하며 일련의 민주화 정책을 실시하며 점차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중국국민당은 민주진보당 등의 정당들과 대권을 번갈아가면서 거머쥐었다.

중국국민당의 기본 정강은 쑨원이 세운 삼민주의이다. 국민당은 국제민주연합의 일원이며, 친민당 등의 정당들과 함께 중국 본토와의 원만한 관계와 재통일을 중시하는 범람연맹에 속해있다. 그러나 중화민국 내에서 반중 감정이 심해지자 국민당도 통일보다는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기본 틀을 잡고 있다. 국민당은 92공식에 의거하여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고 있으나, 중국국민당이 주장하는 합법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이다.

중산릉[편집]

중산릉(中山陵)은 중국의 혁명가 쑨원(孫文)의 묘이다. 쑨원이 1925년 3월 자기가 주도한 국민혁명이 한창일 때 베이징(北京)에서 객사한 뒤로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북벌이 일단 이루어진 1927년 6월 장례는 국민정부 치하의 난징(南京)에서 국장으로 행하여지고 난징 교외 쯔진산록(紫金山麓)에 그 유체를 매장하였다. 이 능묘는 청천백일기를 상징하는 청유리기와 지붕을 이은 당우(堂宇)가 산허리에 솟아 있는 대규모의 것인데, 국민정부는 이곳을 성역화함으로써 그들 정권에 권위를 부여하였다.

쑨중산구쥐[편집]

쑨중산구쥐(孙中山故居)는 중국 광둥성(广东省) 중산(中山)에 있는 쑨원이 살던 집으로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쑨원이 거주했던 저택을 중심으로 조성된 박물관으로서 추이헝촌(翠亨村)에 위치한다. 주강(珠江)을 사이에 두고 선전(深圳), 홍콩을 마주 보고 있으며 육지로는 주하이시(珠海市)에 인접해 있다. 이곳의 중심 건물은 쑨원이 1892년에 직접 세운 붉은 색의 2층 건물로서 중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재된 양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래층의 가운데에는 거실이 있고 뒤편에는 쑨원의 어머니가 살던 침실이 있다. 그 양쪽에는 쑨원과 그의 형 쑨메이(孙眉)의 방이 있다. 위층에는 쑨원의 서재와 객실이 있다.

쑹칭링[편집]

쑹칭링(宋慶齡 1892.1.27.~1981.5.29.)은 중국의 정치가. 쑨원의 부인. 쑨원이 죽은 뒤 국공합작에 노력하다가, 모스크바 ·베를린 등에 가서 머물렀다. 1929년 귀국 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좌파에 속하여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언니는 쿵샹시(孔祥熙)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靄齡), 여동생은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남동생은 재벌인 쑹쯔원(宋子文)이다.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 대총통(大總統) 쑨원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실패 후 쑨원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914년 일본에서 쑨원과 결혼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홍콩(香港)과 충칭(重慶) 등에서 활약하면서 내외의 반(反)파시스트 운동을 지원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국가 부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는 등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스탈린평화상을 받았고, 1952년 이후 소련·인도·미얀마·파키스탄·인도네시아 등에 친선 방문여행을 하였다. 저서에 《쑹칭링선집[宋慶齡選集]》 등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쑨원(孫文,1866.11.12.~1925.3.12)〉,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쑨원 문서는 역사인물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