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이다.
개요
피타고라스는 수학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커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 것이며, 그의 증명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피타고라스는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星形五角形)을 그의 교단의 휘장(徽章)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球形)임을 확신하고,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함을, 지구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생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가 생김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밀려 1000여 년간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과학혁명의 최초에 피타고라스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우주는 코스모스(Cosmos)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1]
생애
피타고라스(고대 그리스어: Πυθαγόρας, 영어: Pythagoras 기원전 570년 ~ 기원전 495년)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 학파라 불린 컬트 종교 단체의 교주이다. 피타고라스 관해 알려진 정보가 대부분 그가 죽고 수 세기 후에 쓰여진 것이라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물다.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집트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널리 여행하면서 학식을 닦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530년 경, 피타고라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토네로 이동하여 종교적인 학파를 세웠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가 개발한 종교적 의식과 훈련을 수행하고 그의 철학 이론을 공부했다. 학파는 크로톤의 정치에도 적극 간섭했는데, 이가 결국 그 자신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사모스 섬에서 지중해 및 에게 해 근처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었던 므네사르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타고라스의 부모는 그로 하여금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여 어려서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우도록 하고 긴 여정의 장삿길에 함께 데려가기도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아래에서 공부하였고, 스승 탈레스의 주선을 받아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 동안 나일강 연안의 여러 신전을 다니며 멤피스의 사제들에게서 기하학과 천문학 등을 배우는 한편 그들의 신비사상에 입문한다. 하지만 이 무렵 이집트를 침공해온 페르시아 제국 사람들이 그를 다른 학자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고 갔다. 피타고라스는 그곳에서 보낸 약 12년 동안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사들과 서기들로부터 방대한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 후 40년 전에 처음 떠나왔던 사모스 섬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대략 60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피타고라스가 귀환할 당시의 사모스 섬은 참주 폴리크라테스의 독재 아래에 놓여있었다. 이로 인해 기원전 532년 피타고라스는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크로토네라는 도시에 정착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공부하며 얻은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는 강박관념이 매우 강했고며, 사모스 섬에서 크로토네로 이주하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이었다.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네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또는 피타고라스 학교)를 설립하였고 많은 젊은이들을 철학자 또는 정치가로 키웠다. 단체의 회원이 점차 늘어나고 배출된 젊은이들이 크로토네를 비롯한 인민 도시의 정치에 참여하여 중요 직책을 차지함으로써 피타고라스 학파는 6세 말엽에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전파시키려는 회원들의 지나친 노력과 피타고라스의 보수적 정치 경향은 크로토네 시민들로부터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바리스의 군대가 크로토네를 공격해 오자,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의 한 장군이 상황을 역전시켜 오히려 시바리스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교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여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데, 바로 승전 후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이 노획품을 독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분개한 크로토네 시민들은 학교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피타고라스를 보호하려 한 그의 제자 서른여덟 명을 살해한다. 피타고라스는 크로토네에서 약간 북쪽으로 떨어진 메타폰툼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사망한 후 그의 제자들은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계속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데에 노력하여 기원전 5세기 말에는 이미 피타고라스 학파와 사상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는 때때로 하나의 종교 단체로 취급되게 된다. 오늘날 흔히 일컬어지는 피타고라스에 얽힌 숱한 일화와 전설들은 이미 이때부터 지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피타고라스의 정리(Pythagorean theorem)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넓이는 나머지 두 변을 각각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 두 개의 넓이의 합과 같다는 정리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피타고라스가 발견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의 정리(Pythagorean theorem)라 불린다. 피타고라스는 철학, 수학, 음악, 천문학, 종교, 의술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독특한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도형을 숫자로 표시하는 기하학의 수론적인 정의를 연구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3세기 전반에 활약한 그리스 사상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는 저서 《고대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피타고라스가 이 정리를 발견한 것을 기념하여 황소 백 마리를 신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피타고라스가 이전까지 세웠던 철학적 수 이론과 상충되는 면이 있었다. 피타고라스 사상에 있어 수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으며 이 수들의 조화가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1~10까지의 각각의 자연수들은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으며, 이 자연수들로 이루어진 분수의 개념을 통해 음의 높낮이와 조화의 미를 이해하려 했다. 일설에 따르면 자연수만으로 풀 수 없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주도 하에 한동안 은폐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를 대중에게 누설한 피타고라스의 제자 히파수스(Hippasus)를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이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출처나 역사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Pythagorean school)는 기원전 6세기~기원전 4세기 사이 피타고라스와 그의 계승자들을 통해 번성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 분파이다. 수(數) 이론을 만물의 근원이자 철학의 핵심 요소로 삼았으며 신비주의적 종교 결사의 모습도 지니고 있었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종교 예언자로 추앙받았던 것처럼 그의 철학사상 또한 과학적이면서도 신비주의적인 이중의 모습을 보인다. 피타고라스 사후 학파 내부의 사상적 전통도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배우는 자(학문파, mathēmatikoi)'는 피타고라스가 정립한 수학, 음악, 천문학 등의 학문적 업적을 계속해서 습득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들이었던 반면, '경청하는 자(계율존중파, akousmatikoi)'는 윤리적 전통과 종교 의식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춘 이들이었다. 무리수를 발견하고 피타고라스의 정수 체계의 허점을 지적한 히파수스(Hippasus)를 비난할 것인가란 문제를 두고 이 두 그룹은 서로 충돌을 빚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긴밀한 사상적 연관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피타고라스 철학에 따르면 만물의 근원은 수(數)이다. 수의 조화가 다양한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시키는 법칙이 된다는 것이다. 음악의 화음과 장단은 그가 코스모스(cosmos)라 칭한 우주의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존중받았다. 또한 1~10까지의 각각의 숫자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윤회설 또한 이러한 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동물의 살생금지'에는 인간의 영혼이 완전하게 정화될 때까지 일정한 수학적 주기를 가지고 다른 생물로 형체를 바꾸며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이 담겨있었다. '콩의 섭취 금지'라는 종교적 규율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으나 콩이 우주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철학적 요소도 존재했다. 요컨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은 과학과 종교를 다른 것으로 보는 현대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오히려 양자의 조화와 통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철학사상
피타고라스는 우주론, 수학, 과학, 그리고 미학을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 이 세계를 단 하나의 법칙에 지배되는 정돈된 전체로 입증하려 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한 앞에서, 그리고 한계 지을 수 없는 것 앞에서 일종의 신성한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현실의 경계를 정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규칙을 숫자에서 찾았다. 우주에 대한 미학적-수학적 전망은 이렇게 피타고라스에 의해 탄생되었다.
피타고라스의 업적
피타고라스의 정리이다.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나머지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정리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현대 수학의 기초를 구축하는 데에 기여했다.
피타고라스 학파 설립이다.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톤(Croton)에 거주하면서 자유주의적인 정치운동에 참여하며, 학파를 이루며 철학과 수학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 학파는 숫자를 중심으로 다양한 철학과 수학, 과학에 대한 이론을 연구했으며, 수많은 개념을 발전시켰다.
피타고라스는 음악과 수학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음계를 기약분수의 비로 표현할 수 있음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순정률과 피타고라스 음률을 발견했다. 덕분에 음악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영혼의 정화가 음악의 목적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음의 협화를 현의 길이의 비례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으며,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러한 이론이 후세에 전해졌다. 또한 순정
동영상
각주
- ↑ 〈피타고라스(Pythagoras,BC582?~BC497?)〉, 《두산백과》
참고자료
- 〈피타고라스(Pythagoras,BC582?~BC497?)〉, 《두산백과》
- 〈피타고라스〉, 《위키백과》
- 〈피타고라스 정리〉, 《나무위키》
- 〈피타고라스〉, 《나무위키》
- 애매한 재능, 〈피타고라스 정리! 세상을 바꾼 직각삼각형의 비밀〉, 《네이버블로그》, 2024-12-05
- 질수는없다, 〈피타고라스 음계란? 음악과 수학의 만남〉, 《네이버블로그》, 2024-11-25
- 은빛해일,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그 역사적 중요성〉, 《네이버블로그》, 2024-11-06
- 고쌤수학국어,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매우 중요해요〉, 《네이버블로그》,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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