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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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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

염하(鹽河)는 "소금처럼 짠 물이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특히, 염하는 강화도김포 사이의 좁은 수로강화해협을 가리킨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바다에 속하기 때문에 강화해협으로 부르는 게 맞지만, 조선 말 병인양요프랑스군이 '염하'라고 잘못 표기하여 그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제국이 프랑스군이 사용한 '염하'라는 표기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개요[편집]

  • 염하는 보통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강화해협을 일컫는 '염하(鹽河)'라는 별칭은 사실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고 대상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 아니다.
  • 염하라는 명칭은 근대의 산물이다. 고려 때도 조선 때도 염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염하라는 명칭이 시작한 것은 병인양요 시기이다. 프랑스군이 지역 주민에게 바다 이름을 물었다. 주민이 짠 물, 짠 강, 뭐 이런 식으로 대답했었다. 프랑스군은 '짠 강'을 직역해서 'Rivière Salèe'라고 해도(海圖)에 기록했다. 'salèe'는 소금을 치다, 짜다는 뜻이다. 'Rivière'는 강, 하천이라는 의미이다. 'Rivière Salèe'는 프랑스군이 작명(作名)한 것이 아니라 강화 주민의 말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강으로 표현한 것은 강화해협이 강처럼 폭이 좁아서 비유적으로 쓴 것이다. 병인양요 후 일본군은 프랑스군이 제작한 강화 해도를 입수해서 자기네 글로 번역했다. 'Rivière Salèe'는 소금 염(鹽) 자를 써서 염하(鹽河)로 직역했다. 이렇게 해서 '염하'라는 명칭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염하의 명칭 유래[편집]

  • 1866년 9월 19일 프랑스 해군의 군함 한 척이 강화해협의 좁은 수로를 따라 천천히 북상하고 있었다. 자국 신부 9명의 처형에 대한 보복 응징을 결정한 프랑스는 세 척의 군함을 동원해 정찰을 목적으로 하는 1차 소규모 원정을 단행하는데 이날 남양만 입파도에 닻을 내리고 통보함 데룰레드號를 보내 조선의 수도 한성으로 가는 수로를 정찰하면서 먼저 해도(海圖)부터 작성하고 있었다. 갑구지 나루에 이르자 몇몇 장교들이 배에서 내려 녹슨 총통이 굴러다니는 갑곶돈과 외성(外城)너머 강화읍쪽까지 살피면서 구경나온 순박하고 호기심 많은 강화주민들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며 해도제작에 필요한 사항들을 주위깊게 탐문하고 있었다. 이 해도제작팀 중, 나중에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가 되는 앙리 쥐베르(Henri Zuber)라는 견습소위가 한 촌로에게 갑구지 앞바다를 가리키며 물은 강물의 이름이 후에 알려진 염하로 되었다. 海圖 그리는 일을 맡았던 쥐베르 소위는 해도의 갑구지 앞바다 부분에 "Rivière Salée"라고 적어 넣었다. 프랑스어로 Salée는 영어의 Salty와 같은 뜻의 형용사로 "짠 / 짭짤한 / 염분이 있는"의 뜻을 가진 단어다.
  • 쥐베르 소위는 1873년 프랑스 잡지 '르 투르뒤몽드'에 기고한 '조선 원정기'에 강화해협을 Rivière Salée로 명명하게된 경위를 분명히 적어 놓았다. 이 조선 원정기가 최근 국내에서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병인양요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내용이다. 이전에 염하가 표기된 지도들은 해도(海圖)였고 군용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이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 일반 지형도에 표기됨으로써 일반인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화해협은 학문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노출빈도가 그렇게 높은 곳이 아니기 때문에 프랑스와 일본이 작명한 이 별칭이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00년을 전후하여 '염하'라는 별칭의 사용빈도가 급증하게 된다. 강화관련 각종 논문에서 부터 보고서, 탐방기사, 칼럼, 여행기 등에 이르기까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강화해협을 염하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여러 사학자들의 집필로 이루어진 2003년판 '신편 강화사'를 들 수 있다.

염하의 문서 증거[편집]

  • 1867년, 일본 해군성 수로국(水路局)은 프랑스에서 이 해도를 입수한 뒤 일본어로 번역하여 다시 펴내는데 바로 위 사진에서 보는 '고려서안 염하지도(高麗西岸 鹽河之圖)'이다. 북쪽 연미정에서 부터 남쪽 황산도 앞까지 약 22Km에 이르는 강화해협을 두 장의 해도에다 나눠 그렸는데 Rivière Salée를 염하(鹽河)로 직역해서 해도의 제목으로 삼았다. 해도는 강화해협을 두 장으로 나눠 그린 것 중의 한 장으로 강화해협 윗부분 절반을 그려 놓았다. 해도 우측 상단에는 이 해도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 휘하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고 일본은 이 해도를 프랑스 해군 해도고(海圖庫)에서 돈 주고 사 온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지도제작 기술이 상당히 뛰어남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위성사진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밀하고 특히 갑구지나루와 대안인 문수산 일대는 지형까지 자세히 묘사해놨는데 프랑스나 일본은 결국 여기를 조선 침략의 시발점으로 삼고 말았다. 1866년 10월 15일 강화부성(江華府城)을 점령한 프랑스 해군 전투부대가 처음 상륙한 곳이며 1875년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결국 군대를 상륙시킨 곳이 바로 여기이다.

강화해협[편집]

  • 강화해협은 인천광역시 강화군(강화도)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海峽)이다. 마치 강(江)과 같다 하여 염하(鹽河)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 때의 최대 유속은 약 3.5m/sec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기도 한다. 강화해협의 북쪽으로는 한강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염하 북쪽의 월곶과 남쪽 황산도 간에는 물높이(해수면 높이) 차이가 아주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예로부터 한국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서해를 북상해 온 세곡선(稅穀船)이 염하를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염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외세를 막는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개항기 때에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를 치른 격전지였다. 염하를 따라 군대 주둔지인 진(鎭)과 보(堡), 초소인 돈대 등 수많은 방어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초지진(草芝鎭, 사적 제225호), 덕진진(德津鎭, 사적 제226호),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227호), 갑곶돈(甲串墩 갑곶돈대, 사적 제306호) 등이 있다. 염하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신의주까지 오가던 뱃길이었는데 전쟁 후 뱃길이 봉쇄되었다가 2007년부터 민간어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염하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 있다.[1]

염하의 명칭에 관한 논란[편집]

  • 일본 해군만 이 프랑스製 해도를 입수한 것은 아니다. 1871년 신미년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과 개항을 목적으로 내침했던 美海軍도 이 프랑스 원본을 편집한 해도(Compiled from French chart No.2618)를 갖고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미해군역사센터 홈페이지(www.history.navy.mil)에는 해군사편찬협회에서 발간한 책자 "1871년 해병대의 한국 상륙작전Marine Amphibious Landing in Korea,1871)"의 내용이 실려있는데 여기에 첨부한 사진 설명 문구 중에 'Salée River'가 보인다. River는 영어지만 Salée는 프랑스어 표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Salée River'를 강화해협의 고유명사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는 이방인들의 얘기일 뿐 정작 조선은 이 염하(Salée River)라는 호칭을 어디에도 사용한 적이 없다. 강화해협 북단에서 만나게 되는 한강하류를 조강(祖江)이라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이 조강은 조선시대 각종 지도에 자주 표기되는 우리 고유의 전래 지명이다. 무심히 흐르는 강화해협의 바닷물을 뒤로 한 채 그렇게 19세기가 저물어 갔다.
  • 20세기에 들어서서 鹽河 (Salée River)라는 별칭이 좀 더 알려지는 계기가 발생한다. 일제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1914년부터 1918년까지 한반도 전역에 대해 측량을 실시하고 1대 5만 지형도를 제작한다. 지도제작 사업과 병행해 1914년에는 부(府), 군(郡), 면(面), 동(洞), 리(里)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하고, 아울러 지도에 표기되는 행정구역 명칭을 비롯해 취락, 도로, 산지, 하천, 평야, 해안, 숲, 주요 시설 등의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정비해 버렸다. 바로 이 지도에 강화해협을 염하로 표기한 것은 물론이다. 50여 년 전에 사용했던 '고려서안 염하지도(高麗西岸 鹽河之圖)'가 이의 근거가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화군 선원면 연리와 김포군 월곳면 포내리 사이의 해협에다 鹽河라는 글자를 크게 박아 놓은 이 지도는 강화군이 2003년에 발간한 지도책 '江華 옛地圖'의 198 -199쪽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 이 지도의 일부를 확대해서 게재한다.

용두돈대[편집]

  • 용두돈대(龍頭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이다.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며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당시 돈대 안에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는 손돌풍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돌목이다. 염하 건너편 덕포진 언덕 위에는 손돌풍 전설의 주인공 손돌의 묘가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염하(鹽河)〉,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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