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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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섬(그리스어: Κύπρος, 튀르키예어: Kıbrıs, 문화어: 끼쁘로스섬) 또는 사이프러스섬(영어: Cyprus)은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이다. 키프로스섬은 위도로는 240km, 경도로는 100km, 면적은 9,251km², 시칠리아섬, 사르데냐섬 다음으로 지중해에서 3번째로 큰 섬이며, 세계에서 81번째로 큰 섬이다. 키프로스섬은 현재 4개 지역으로 나뉜다.[1]
개요[편집]
키프로스섬은 튀르키예의 남쪽, 그리스의 동쪽에 위치한다. 기원전부터 그리스 문화권에 속했고 국민 대다수가 그리스인이지만 그리스에서는 꽤 멀고 시리아, 레바논 등의 중동 지역에 가깝다. 키프로스의 수도 니코시아에서는 아테네보다 앙카라나 카이로가 훨씬 가깝다. 그래서 굳이 따지면 아시아(중동)로 분류하나 여러 면에서 유럽으로 보기도 한다. 유럽연합 가입 이후로는 유럽으로 분류하고 유럽 지도에도 꼭 들어가게 만드는 편이다. 면적은 9,251㎢로 충청북도와 제주도를 합친 수준과 비슷하며, 인구는 113만 명이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해마다 24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인기 관광지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60년에 독립하여 1961년 영연방에 가입하였다. 1974년, 그리스 군사 정권의 지원을 받은 에노시스 운동파가 키프로스섬을 그리스에 병합하고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터키는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섬의 약 36%를 점령하였다. 터키는 키프로스에 군사 개입을 하면서 미국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비밀 지원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으며, 키프로스섬 북부에 북키프로스 정부가 수립되어 남북이 분단되었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매우 선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2]
키프로스섬의 생물 환경은 산지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중앙 평원인 메사오리아로 산맥이 지난다. 트로도스 산맥이 섬 남부와 서부 지역을 지나며, 이 지역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좁은 키레니아 협곡은 북부 해안선을 따라 뻗어 트로도스 산맥보다는 훨씬 좁은 지역을 차지하며 고도도 낮다. 키프로스의 이 두 산맥은 터키 본토의 타우루스 산맥과 보통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타우루스 산맥은 키프로스 북부에서도 그 능선이 보인다. 섬 주변으로는 폭이 들쭉날쭉한 해안 저지가 둘러싸고 있다. 큰 하천이 없어 물이 부족한 편이나 최근 터키와 북키프로스를 잇는 해저 수도관이 건설되었다. 터키 측은 키프로스와 북키프로스 간의 협상이 진행되면 키프로스 공화국에도 이 수도관을 통해 물을 공급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제적으로 승인된 키프로스섬 유일의 합법 정부인 키프로스(키프로스 공화국)는 법적으로 영국에 할당된 군사 기지 지역인 아크로티리 데켈리아를 제외한 키프로스섬 전체 및 모든 해역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으나, 사실상 키프로스섬 북부의 북키프로스(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와 분단된 상태에 있다.
지리[편집]
키프로스섬은 시칠리아섬, 사르데냐섬 다음으로 지중해에서 3번째로 큰 섬이며, 세계에서 81번째로 큰 섬이다. 터키 아나톨리아의 남쪽에 위치한 키프로스섬은 지리상으로는 서남아시아로 분류되지만 유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키프로스섬은 북쪽으로는 터키, 동쪽으로는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서쪽으로는 그리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접한다. 키프로스섬은 위도로는 240km, 경도로는 100km에 이르며, 터키로부터 남쪽으로 75km 정도 떨어져 있다. 동쪽에 위치한 시리아와는 105km, 레바논과는 108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스라엘과는 200km,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와는 남쪽으로 380km 떨어져 있다.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 로도스섬과는 400km, 그리스 본토와는 800km 정도 떨어져 있다. 국제적으로 승인된 키프로스섬 유일의 합법 정부인 키프로스(키프로스 공화국)는 법적으로 영국에 할당된 군사 기지 지역인 아크로티리 데켈리아를 제외한 키프로스섬 전체 및 모든 해역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으나 사실상 키프로스섬 북부의 북키프로스(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와 분단된 상태에 있다. 키프로스섬은 현재 4개 지역으로 나뉜다.[3]
- 키프로스(키프로스 공화국) 실효 지배 지역: 5,296km² (키프로스섬 전체 면적의 59.74%를 차지함)
- 북키프로스(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 실효 지배 지역: 3,355km² (키프로스섬 전체 면적의 34.85%를 차지함)
- 유엔 키프로스 완충 지대: 346km² (키프로스섬 전체 면적의 2.67%를 차지함)
- 영국의 아크로티리 데켈리아 군사 기지 지역: 254km² (키프로스섬 전체 면적의 2.74%를 차지함)
역사[편집]
키프로스섬에는 선사 시대부터 문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중해 무역의 중계점이었던 키프로스는 페르시아 제국,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을 비롯한 각 시대를 대표한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1191년에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 국왕이 이끌던 제3차 십자군에 점령되면서 성전기사단의 지배를 받게 된다. 키프로스섬은 나중에 예루살렘 왕국의 기 드 뤼지냥에게 매각되었고 1489년 이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키프로스섬은 1570년부터 1571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었고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 패배하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키프로스섬은 1925년에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1960년에는 키프로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키프로스섬에서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74년 7월 15일에는 키프로스의 이웃 나라인 터키가 터키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키프로스섬 북부를 침공했고 1983년 11월 15일에는 북키프로스가 키프로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키프로스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분단[편집]
1973년 11월 그리스 군사 정권 내에서 내분으로 쿠데타가 일어났고 정치,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던 그리스 군사 정권은 그리스 내 국민의 불만과 반대파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1974년 7월 15일에 에노시스 운동파 군인들을 조종해 키프로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니코스 삼손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는 그리스 민족주의자이긴 했으나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병합을 선언하지 않았으며 키프로스가 계속 독립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터키 정부는 키프로스 쿠데타를 강력히 비난하며 영국에 개입을 요구하였으나 개입을 꺼리자 쿠데타 5일 후인 7월 20일에 1960년의 취리히 및 런던 협정에 따른 키프로스의 헌법 질서를 회복시킨다는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사태에 개입하였다. 그리스는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이란 준군사조직을 새로 만들어 침략자를 격퇴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터키가 점령한 지역 내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추방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그리스군은 터키의 진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섬의 남동쪽 끝에 위치한 아야 나파 지역은 영국의 군사 지역인 데켈리아 뒤에 있었기 때문에 터키의 점령을 피하였다. 당시 키프로스 국토의 약 36%가 터키의 점령지가 되면서 북쪽에 있던 17만여 명의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과 남쪽에 있던 5만여 명의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각각 터전을 잃었다. 터키 군대가 북부 영토를 장악한 이후, 키프로스 공화국은 북부 지역의 모든 통관항을 봉쇄한다고 발표하였다. 1983년에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은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 연합의 압력으로 터키 외에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분쟁으로 인해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1,534명과 터키계 키프로스인 502명 이 행방불명되었다. 1974년 여름의 이 사건은 키프로스뿐 만 아니라 그리스와 터키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이후 국제 사회의 합의를 무시하고 10만여 명의 튀르키예인이 터키로부터 이주해 북키프로스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니코시아는 현재까지 분단된 수도로 알려져 있으며, 터키군의 침공으로 폭파된 니코시아 국제공항은 폐허가 된 채 그대로 봉인되어 있다. 건물의 일부를 UN군이 쓰고 있는 것 외에는 공항이 봉쇄된 상태며, 현재 키프로스 제1의 관문은 동부 해안에 있는 라르나카 국제공항이다. 국제적으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고 있는 남부의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에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2008년 1월 1일에는 유로존에 가입하였다.[4]
주민[편집]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모두 과거에는 키프로스섬 전역에 살았으나, 1974년 분단 이후 북부에 살던 그리스계 주민 대부분은 남부로, 남부에 살던 터키계 주민 대부분은 북부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그리스계 주민의 99.5%가 남키프로스에, 터키계 주민의 98.7%가 북키프로스에 거주하고 있다. 북키프로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터키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심하고, 10만여 명에 이르는 튀르키예인들이 터키로부터 이주해 북키프로스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도 소수의 미국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두호보르파), 아랍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북키프로스에는 중국, 북한 계통 외국인들도 대거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어와 튀르키예어가 키프로스의 공용어이다. 영어도 사용된다. 인구의 76%가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 키프로스는 2006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의 결과 준회원국이 되었다.[5]
자연[편집]
1974년 전쟁으로 두동강나던 당시, 국경에 맞닿은 해안 도시 바로샤(Varosha)는 튀르키예령이 되었으나 한국의 비무장지대처럼 양 군이 대립하고 온갖 무기들이 설치되어 튀르키예 사람들은 물론, 튀르키예군조차도 머물지 않아서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었다. 덕분에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손꼽히던 바로샤에 막대한 투자를 한 그리스나 해외 투자자들은 지금도 튀르키예 측에 손해배상을 요구하지만, 모르쇠로 일관 중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이렇게 잊혀 가던 바로샤가 주목을 받은 것은 사람이 전혀 없어진 이 높은 빌딩과 호텔투성이 개발도시에 자연이 알아서 회복력을 보여준 점이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온갖 풀들과 나무들은 빌딩과 호텔들까지 휘감았고 키프로스 전역에서 멸종에 가까웠거나 희귀종이던 동물들이 알아서 바로샤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다. 2004년 튀르키예 학자들은 바로샤에 조사차 와서 다른 키프로스의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쾌적한 대기 상태, 자연 속 비둘기들과 온갖 동물들이 사람이 만든 건물 여러 곳에서 살면서 사람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북키프로스와 튀르키예 측이 바로샤를 재개발 하려고 하지만 논쟁이 격렬하다. 애써 재개발하려고 해도 튀르키예밖에 인정하지 않기에 국제 은행을 통한 자금 모음도 불가능하고, 결국 튀르키예 혼자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설령 그리 된다고 해도 그리스계 이전 거주민들의 피해 보상 요구가 더 거세질 것이기에 한동안 개발이 활성화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손해 배상을 요구하던 그들이 재개발에 찬성하기는 했다. 다만 재개발한 시설의 소유권 양도를 요구했다. 오히려 튀르키예 환경단체들이 결사반대하고 있으며 이는 남키프로스나 그리스 측 단체들도 동감하고 있다. 미국이나 해외 동식물학자들도 재개발이 된다면 저 자연이 다시 훼손된다고 우려하는 상황이다. 원래 거주민들에게 배상은 다르게 해결하고 차라리 자연보호지역으로 만드는 게 어떤가 하는 의견도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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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키프로스섬〉, 《위키백과》
- 〈키프로스〉, 《위키백과》
- 〈키프로스〉, 《나무위키》
- 〈키프로스/역사〉, 《나무위키》
- 〈키프로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레반트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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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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