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과학(科學, Science)은 사물의 구조, 성질, 법칙 등을 관찰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좁게는 인류가 경험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하여 실험을 통해 얻어낸 자연계에 대한 지식들을 의미한다.[1] 과학자들은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현상들을 과학적 방법에 따라 자연적인 (초자연적이지 않은)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과학은 우주에 대한 검증 가능한 설명과 예측의 형태로 지식을 구축하고 조직하는 엄격하고 체계적인 노력이다. 현대 과학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주요 분야로 나뉜다. 즉, 물리적 세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예: 생물학, 화학, 물리학), 개인과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예: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공리와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형식 시스템을 연구하는 형식 과학(예: 논리학, 수학, 이론 컴퓨터 과학)이 있다. 형식과학이 경험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 분야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다. 응용과학은 공학이나 의학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과학적 지식을 사용하는 학문이다.
과학 분야의 역사는 역사적 기록의 대부분에 걸쳐 있으며, 기원전 30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청동기 시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대 과학의 식별 가능한 전임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포함된다. 수학, 천문학, 의학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에 들어가고 형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물리적 세계의 사건을 자연적 원인에 기초하여 설명하려는 공식적인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힌두교의 도입을 포함하여 더욱 발전했다. 아라비아 숫자 체계는 인도 황금시대에 만들어졌다.: 12 중세 초기(서기 400~1000년)에 서로마 제국과 굽타 제국이 멸망한 후 이 지역의 과학 연구가 쇠퇴했지만 12세기에 보존되고 확장되었다. 이슬람 황금 시대 동안 중동에서 그리고 나중에 르네상스 시대에 죽어가는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사본을 서유럽으로 가져온 비잔틴 그리스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수행되었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그리스 작품의 회복과 동화, 서유럽에 대한 이슬람 탐구는 '자연철학'을 부활시켰고, 이는 나중에 16세기에 시작된 과학혁명에 의해 이전 그리스 개념에서 출발한 새로운 사상과 발견으로 변형되었다. 과학적 방법은 곧 지식 창출에서 더 큰 역할을 했으며, 19세기가 되어서야 과학의 많은 제도적, 전문적 특징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자연 철학'이 '자연 과학'으로 바뀌었다.
목차
어원
科學
조선시대에는 科學(과학)이라는 단어를 과거를 위한 학문의 줄임말로서 불렀다. 철학, 민주주의 등 현대 용어 중에서 한자로 풀이된 것들 중 대부분은 일본의 교육자 니시 아마네(西周)가 번역한 용어이며 과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1874년 니시 아마네(西周)는 서양의 여러 학문 용어를 번역하면서 'Science'의 역어로 科學(과학)을 채택했으며, 명륙잡지(明六雜誌)에 연재된 《지설(知說)》이란 글에서 처음으로 '과학(科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만 처음 사용했을 당시에는 단지 서양식 교육과정에 포함된 '각 분과(分科)의 학문(學)'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당시 용례로는 흔히 말하는 'Science'의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Science로서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과학(科學)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고 '격물학'(格物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 논쟁의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바와 같이 '과학'이 이겼다. 결국 어원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현재는 'Science'의 역어로 완전히 정착된 상태다.
과학의 새로운 지식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문제 해결에 대한 열망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발전된다. 현대 과학 연구는 고도로 협력적이며 일반적으로 학계, 연구 기관, 정부 기관 및 기업의 팀에 의해 수행된다. 이들 작업의 실질적인 영향으로 인해 상업용 제품, 군비, 의료, 공공 인프라 및 환경 보호의 윤리적, 도덕적 발전을 우선시함으로써 과학 사업에 영향을 미치려는 과학 정책이 출현하게 되었다.
Science
한편 과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science'는 라틴어 동사 scire(알다)의 명사형 scientia(앎, 지식/skiˈen.ti.a(고전),ʃiˈen.t͡si.a(교회))에서 유래됐다.
어원적으로 보면 과학은 특정한 지역의 철학에서 비롯한 방법이다. 고대철학을 분류하는데 그리스(마케도니아 왕국-헬레니즘 제국)의 철학을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리스인들의 철학이 매우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만 몰두하는 성격을 가졌다. 다른 철학들은 뭐가 다른가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식 자연철학을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상에 가깝다. 중동의 철학 역시도 인간의 내세와 도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지식인계층은 다른 문명과 달랐다. 그들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문명에 비해서는 놀랄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들의 주된 토론 주제는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였다. 그들은 불이 세상의 근본인지. 물이 세상의 근본인지. 4원소가 세상의 근본인지. 작고작은 원자가 세상의 근본인지. 아예 물질화할 수 없는 개념인 이데아가 세상의 근본인지.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아가 아니라 그것을 채우고 있는 진흙덩어리, 질료가 세상의 근본인지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언론학에서 일단 제일 먼저 누가 질러 놓으면 그것에만 떠드는 성격을 흔히 '아젠다'라고 하는데 그리스의 지식인들의 아젠다는 심성이나 종교. 정치. 기술보다는 세상을 구성할 수 있는 근원과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탈레스라는 사람이 자연철학의 최초의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그는 물을 답으로 내놓았지만 알다시피 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의는 물이라는 오답에 있지않다. 질문이었다. 도대체 세상은 왜?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이다. 현재로서는 이게 뭐가 특이한 생각인지 의아하다고 할 수 있겟지만 그건 놀랄정도로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를테면 동아시아처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던가 중동처럼 세상을 누가 조종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실용적인 것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한문명의 지식인들이 그걸 가지고 몇천년간 키배를 한 것에서 과학이 탄생했으니 그 질문의 의의가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을 가리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한국어로 학문과 과학이라고 다르게 표현하지만 어원적으로는 모두 자연학에 기인한다.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연구하면서 발달시켰던 방법론과 설명방식을 모든 방식에 적용하면서 사실상 자연철학 자신은 사라졌지만 대신 존재하는 모든학문을 자연철학의 방법에 종속시켰다. 그렇지 못한 학문체계는 반과학/사이비과학/야만으로 몰아내었으며 학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아직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거나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만 사회나 인문의 이름을 붙여 격리했다.
과학의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이러한 '그리스 철학'에 대한 존중으로 학문분과의 명칭은 굉장히 보수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대학을 의미하는 아카데미라는 단어는 그리스의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를 그대로 쓰는 것이고, 철학, 물리학, 수학, 공학 등의 이름도 Φυσικὴ ἀκρόασις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의 챕터명을 그대로 학문 분과로 삼았다. 철학 중 인문학 쪽에 가까운 것을 제외한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도 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ὰ βιβλία (Ta meta ta physika biblia)에서 기인한 것으로 메타-피지카, 즉 "자연학 다음 장"을 그대로 학문 분과명으로 삼는다. 형이상학이란 단어가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책에서 철학 챕터가 물리학 챕터 바로 다음에 쓰여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다. 이처럼 그 근원부터 사소한 단어선택까지 현대과학에서 고대 그리스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서양철학사적 과학
현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과학은 역사적으로 서양철학의 발명품이다. 가장 원시적인 것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주된 주제로 삼아서 고민하던 것이었다. 현대인이 읽어보면 헛소리의 향연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노력 때문에 나중에 화학의 기초인 원자의 개념이 고안되었고, 그들의 자연을 수학으로 해석하는 노력이 쌓여서 물리학의 단초가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집성되는데, 그는 연역법과 귀납법으로 요약되는 논리학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지식을 생산(=귀납법)하고, 정리(연역법)하는 체계를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해서 중국, 일본에서는 "왜 동양은 과학이 없었는가?"하는 것이 커다란 철학적 질문이었는데, 그 원인으로 꼽히는 것중 하나가 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부재이다. 다시말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동등한 것을 동양인들은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과학도 못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정말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과학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성과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과학으로 탄생한 직접적인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관련이 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나?"라는 신학적인 질문을 답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학문체계가 동원되었는데, 그것이 스콜라주의이다. 이들 신학자들은 주된 '진리', 즉 신의 말씀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연역법을 주된 방법으로 쓰느냐, 귀납법을 주된 방법으로 쓰느냐를 놓고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각각의 사상이 발전한다.
그리고 이 중에 유명론과 경험주의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분위기 속에서 뉴턴이라는 천재가 나타나면서 비로서 현대의 우리가 아는 그 '과학'이 탄생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반복되는 현상을 관찰해서(=귀납법), 이를 기반으로 원인(x)과 결과(y)라는 함수로 표현되는 논리(수학)적 설명을 내놓는(=연역법) 과학적 방법론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데카르트가 좌표 그래프로 2차함수를 표현하는 방법을 발명한 것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서양철학은 과학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가장 열성적으로 그 한계점을 파악하는 고민도 했다. 경험주의자였던 흄이 소위 '귀납의 문제'라 불리는 귀납법의 한계(=과학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이 곧 '진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서양지식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과학적 지식이 '진리', 그러니까 신의 말씀을 대체해버릴 것이라는 은근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가 처참히 깨졌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이 신의 언어로 쓰여진 자연(창조론에 근거하는 믿음이다)을 해석하는 만큼, 과학자가 신학자에게 꿀릴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프리메이슨과 같은 김칫국을 들이키던 와중이었다. 이렇듯 과학에 결정적인 한계를 지적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의 탄생에 지분이 큰 경험주의에서 나왔는데, 과학을 어떻게든지 무결하게 만들려는 처절한 노력은 또 그 반대편인 이성주의자인 칸트와 헤겔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실패했다. 비록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더 나은 방법이 없으므로 일단은 "귀납법에 기반한 과학이 최선이다."라는 다소 아쉬운 결론을 내린다.
한편 서양철학의 인식론은 이 과정에서 과학에 중요한 관점을 하나 선물했다. 칸트가 위 귀납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로 인간이 우주를 이해를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관점은 서양철학 내에서 '절대적 진리'는 인간이 알 수 없고, '해석(설명)'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관주의적 기류로 발전한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접근법은 과학자들이 공공연히 가지고 있던 기독교스러운 미신과 편견을 날려버리는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서 뉴턴은 우주에도 좌표가 존재하고, 그 원점(x=0,y=0)이 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소위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인과관계의 확정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게 기독교와 인간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 19세기 중엽부터 논쟁이 시작되어서는 1900년 즈음에는 서양철학 내에서는 정리가 어느정도 끝난다. 30년이 지나서 아인슈타인은 뒷북을 치고 있었던 셈이다. 다행히도 최신 철학을 접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신세대 독일 과학자들은 이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오늘날에도 주류의 과학자들은 불가지론을 추종하는데, 이는 위와 같은 칸트와 인식론의 유산이다.
다만 20세기 들어서 서양철학은 자신들이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던 그 과학과 오히려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주된 원인은 위 주관주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들과 상당수의 과학자들 때문이다. 서양철학자들은 이렇게 잔존해 있는 객관주의가 기독교의 아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다시말해서 기존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받들듯이 과학적 지식을 무결하고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분위기가 있었다고 본것이다. 위 귀납의 문제로 볼때 이 믿음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객관주의를 무너트리려고 총력을 다하게 되는데,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문제는 아직 서양철학 내에서도 주관주의적 접근법에 대한 고민이 아직 설익은 시점에 칼을 뽑았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1970년대의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지만, 결국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리한 주장을 펼치면서 급속도로 몰락해버렸다. 아마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관점에 우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한 지점일 것이다. 다만 사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몰락했지만, 본래 취지였던 객관주의의 타도에는 성공했다. 덕분에 과학자들이 이전 세대가 겪었던 구태연연한 편견이나 권위주의적인 악습에서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다.
이렇듯 서양철학은 과학을 탄생시키고 발전하는데 기여를 했지만, 과학으로부터 끊임없이 사상의 단초를 제공받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역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했고, 데카르트는 당대 최신 천문학과 해부학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했으며, 뉴턴이 근대철학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고, 니체 계열 철학자들은 최신 생리학 발견에 힘입어 사상을 전개했다. 한편 뉴턴이 데카르트와 경험주의의 혜택을 누린 것이나, 양자역학이 현대철학에 빚진 지점도 존재한다. 이렇듯 철학과 과학은 어느게 먼저냐고 하기 어려울 만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온 것이다. 철학이 과학적 지식에 힘입어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를 깨부수고, 과학이 다시 그 상상력에 기반하여 새로운 설명을 내놓는 선순환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
기록된 과학 연구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동북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그의 책 《과학과 기술의 인명 백과사전》에서 과학은 고대 아프리카가 현대 세계에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의 성직자 임호테프는 처음으로 약을 조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최초의 대규모 과학 연구소라 할 수 있는데, 유클리드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을 비롯해 고대의 주요 과학자들 중 많은 수가 여기에서 연구를 했다. 이집트의 뒤를 이어, 고대 그리스에서도 많은 과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과학에 대한 발전이 있었으며, 산업 혁명 후 과학에 대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또한, 동양에서는 주판을 비롯한 계산기가 발견되고 나침반, 화약 등이 발명되면서 과학이 발전해 나갔다.
중세에는 대학 네트워크가 유럽에 설립되었다. (예: 1364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폴란드), 138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독일))
현대적 의미의 과학은 17세기에 과학적 방법이 정립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분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 즉 경험과학은 크게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가, 아니면 인간 사회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경험에 기반하나, 예외적으로 경험이 아닌 추상적 공리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과학 분야가 존재하며, 이를 형식과학이라 한다. 응용 방법에 따라 응용과학과 순수과학으로도 분류할 수 있으나, 이러한 분류는 너무 낡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으며, 세계 각국의 과학계(한국의 경우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에선 과학의 분류를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자연과학
자연과학은 여러 자연 현상 속에 숨겨진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가장 좁은 의미의 과학은 이 자연과학을 뜻한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이성과 관찰 가능한 증거를 바탕으로 물리적 세계, 특히 인간의 행동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닌 자연의 원리에 대해 검증 가능한 방법을 통해 알아보는, 또는 더 잘 알아보려는 노력이자 그러한 노력의 산실이다. 즉, 결과 자체로 미래를 추정하는 학문이 아니라 과정을 토대로 하여 자연의 규칙성을 찾아내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궁극적인 목표가 애매한 편이나 대충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일반인과의 타협의 선이 되지 않는가 싶다. 이런 의미가 깊숙히 들어간 단어로는 코스모스가 있다.
사회과학
사회과학은 인간이 이루어놓은 단체, 구성 모든 것들과 사회, 제도 등등을 과학적 방법론 등을 사용해 기술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에서처럼 모델을 만들어서 사회를 설명하거나 예측하기도 한다. 인간이 이룩한 것을 연구하는 측면에서는 인문학과 같으나 인문학과 구별하자면, 인문학이 인간세계의 현상에 대한 규범적 성찰에 무게를 두는 반면, 사회과학은 인간세계의 현상을 가능한 한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물론 이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심지어 자연과학이라 할지라도 그럴 정도. 또한 사회과학은 인간사회를 연구하기 때문에 물질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달리 잘 통제된 실험이 어렵고, 주로 관찰을 기반으로 한 통계연구/사례연구/참여관찰로서 이론을 실증한다는 차이가 있다.
형식과학
형식과학은 추상적 구조에 기반한 여러 가지 규칙인 형식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의 다른 분야와 달리, 추상적으로 정의되어 더 이상 원시화될 수 없는 명제인 공리를 학문의 초석으로 둔다. 그리고 이 공리에 모순되지 않는 명제들을 증명을 비롯한 여러 방법들을 통해 쌓아나간다. 그래서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공리를 정의하고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학문의 근간이 달라질 수 있게 된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또한 형식과학은 현실의 현상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다른 과학 분야에 필요한 여러 과학적 방법을 제공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형식과학은 과학 내에서 독특한 입지를 갖고 있다.
응용과학
응용과학은 다른 과학 분야, 특히 자연과학에서 발견된 이론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실생활이나 여러 산업 분야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나, 세부 적용 사례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다. 응용과학의 특징으로는 자연과학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응용과학의 대표적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공학은 자연과학과의 관계가 깊으며, 서로가 상호 견제 및 교류를 통해 발전해 왔다, 또 다른 주요 분야인 의학은 이미 생물학과의 학제간 교류 및 공동연구가 보편화되어 있다.
과학적 방법
과학적 방법이란 연역과 귀납의 논리학을 바탕으로 관찰-이론-실험-재현을 바탕으로 한 과학, 즉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칭한 말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검증 가능한 질문에 대해 연구하는 방법을 말한다. 어떤 연구가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아래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문제가 정의되어야 하고 연구문제는 기존의 이론이나 결과들과 관련지어 기술되어야 한다. 연구의 모든 변인과 절차들이 조작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과학 철학
과학적 탐구와 과정을 설명하고 형식논리학과 방법론, 형이상학 등의 관점에 요소들의 타당성을 연구하는 것을 과학철학이라고 한다. 과학철학은 두 가지 갈래로 나누는데 인식론적 경향과 존재론적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과학철학에는 다양한 사고 학파가 있다. 가장 대중적인 입장은 경험주의로, 지식은 관찰을 포함하는 과정에 의해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과학 이론은 관찰을 일반화한다. 경험주의는 일반적으로 귀납주의, 즉 유한한 양의 경험적 증거로부터 일반 이론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설명하는 입장을 포함한다. 경험주의에는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며, 그 중 가장 우세한 것은 베이지안주의와 가설 연역적 방법이다.
경험주의는 지식은 관찰이 아니라 인간 지성에 의해 창조된다는 데카르트의 입장인 합리주의와 대조된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오스트리아-영국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처음 정의한 과학에 대한 대조적인 20세기 접근 방식이다. 포퍼는 경험주의가 이론과 관찰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거부했다. 그는 이론은 관찰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은 이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론 A가 관찰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론 A가 관찰과 충돌한 이후지만 이론 B는 관찰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포퍼는 과학 이론의 랜드마크로서 검증 가능성을 반증 가능성으로 대체하고, 경험적 방법으로 귀납을 반증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포퍼는 실제로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과학, 수학, 철학, 예술을 포함하여 인간 정신의 모든 산물을 포괄하는 비판, 시행착오의 부정적인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또 다른 접근법인 도구주의는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도구로서 이론의 유용성을 강조한다. 과학 이론은 입력(초기 조건)과 출력(예측)만 관련이 있는 블랙박스로 간주된다. 결과, 이론적 실체, 논리적 구조는 무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된다. 도구주의에 가까운 것은 구성적 경험주의이며, 이에 따르면 과학 이론의 성공에 대한 주요 기준은 관찰 가능한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사실인지 여부이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관찰과 평가의 과정이 패러다임, 즉 프레임에서 이루어진 관찰과 일치하는 논리적으로 일관된 세계의 "초상화" 내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상과학을 패러다임 내에서 일어나는 관찰과 "퍼즐 해결"의 과정으로 규정한 반면, 혁명적 과학은 패러다임 전환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각 패러다임에는 고유한 질문, 목표 및 해석이 있다.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에는 세상에 대한 둘 이상의 "초상화"를 설정하고 어떤 유사성이 가장 유망한지 결정하는 것이 포함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에서 상당한 수의 관측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를 이해할 때 발생한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택은 기존 패러다임의 배경에 대해 관찰이 이루어지더라도 관찰을 기반으로 한다. 쿤에게 패러다임의 수용 또는 거부는 논리적 과정인 동시에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나 쿤의 입장은 상대주의적 입장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창조과학"과 같은 논란이 많은 운동에 대한 과학적 회의주의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또 다른 접근법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연과 초자연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하며 과학은 자연적인 설명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이 경험적 연구와 독립적인 검증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자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뜻한다. 넓은 의미로 과학에 포함되는 사회과학이나 응용과학, 형식과학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과학자'라고 일컫는 직업을 지닌 사람은 사실상 없다. 과학자라는 범주 안에 여러가지 직업들이 포함되있는 것이다. 과학자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주로 대학 교수와 연구소의 연구원들이다. 물론 인류 역사상 대학에 가지 않고도 큰 업적을 이룬 과학자가 있기는 하다. 아이작 뉴턴이나 페러데이와 같은 "일반적으로 과학자에 속하지 않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과학을 연구하여서 큰 업적을 이루었고 이들은 개인적으로 과학을 연구한 사람들이기에 과학자가 맞다. 직업으로서의 과학자가 아닌 순수한 과학자였던 것. 즉, 굳이 직업으로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직업을 물어보면 어느 연구소의 연구원이라거나 어떤 대학의 교수라고 하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명칭의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통상적으로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으로 자주 언급되는 과학자가 이런 이미지이다. 과학자라는 말이 그만큼 넓은 범주에 드는 개념이란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정말로 "과학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괴짜(?)들도 있긴 하다. 이 설명에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대학원생, 정부출연연구소 및 기업에서 근무하는 연구원, 대학에서 강의 및 연구를 하는 교수 정도의 범위를 합치면 대략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자'의 범주와 비슷해진다.
과학에 대한 이미지
현대 사회에서 과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 국가의 발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여러 가지 분야 중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고 있다. 대중들이 과학에 보내는 신뢰는 대단하다. 이런 이미지를 보고 유사과학 같은 것이 생기기도 한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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