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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5일 (월) 21: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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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반도(영어: Kola Peninsula, 러시아어: Кольский полуостров, 핀란드어: Kuolan niemimaa, 북부 사미어: Guoládatnjárga, 문화어: 꼴스크 반도)는 러시아의 북쪽에 위치한 반도로 무르만스크주의 일부이다. 북극해의 바렌츠해와 백해(白海)를 가르는 반도이다. 서쪽의 접한 지역은 콜라만에 접한 이만트라호, 콜라호, 니바강이다. 어원은 사미어로 '생선이 풍부한 땅'이라는 뜻이다.[1]
개요
콜라반도는 서쪽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해당하며 러시아와 노르웨이, 핀란드와의 국경이 된다. 러시아를 북유럽보다는 동유럽권으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완연한 북유럽으로 볼 수 있다. 중심 도시는 무르만스크이고 최고봉은 반도 서부의 1,191m인 히비니산(Khibiny)이며, 일반적으로 대지상(臺地狀)을 이룬다. 콜라반도 북쪽은 가파르고 험준한 지형이지만, 남쪽은 평지이고, 서쪽은 산지에 접해 있으며 빙기(氷期)에 빙식(氷蝕)을 받아 호소와 소택지가 많다. 콜라반도는 기원전 7-5천년에 인류가 이미 반도 북쪽에 정착한 반면, 그 나머지 영토는 다양한 민족이 남쪽에서 이주하기 시작한 기원전 3천 년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서기 1천년이 되자 사미족만이 남았다. 이것은 12세기에 러시아 포모르족이 사냥감과 물고기의 풍부한 자원을 발견하면서 바뀌었다. 포모르족의 뒤를 이어 노브고로드공화국의 공물 수집가들이 뒤따랐고 반도는 점차 노브고로드 땅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노브고로디안은 15세기까지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하지 않았다. 소련기간(1917-1991) 반도 전체는 주로 전략적 위치와 광대한 아파타이트 퇴적물의 발견으로 인해 고도로 산업화되고 군사화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경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인구는 1989년 115만 명에서 2010년 79만5천 명으로 줄었다. 대부분은 북극권 이북에 있으나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아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다. 북부는 난류의 형향으로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보이지만, 평균 기온은 1월에는 -10℃, 7월에는 10℃를 보인다. 남쪽은 타이가, 북쪽은 툰드라가 형성되어 있다. 북극권보다 위도가 높은 반도 북부의 평균 기온은 1월에 약 -10℃ 정도인데 겨울에도 바다가 잘 얼지 않아 무르만스크, 세베로모르스크 같은 부동항이 개발되었다. 키롭스크 부근에서는 인광석(燐鑛石)을 산출하며 그 밖에 니켈, 구리, 코발트, 백금, 철광 등의 자원도 풍부하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구멍을 팠던 곳이기도 하다. 콜라 초심층 시추공(Кольская сверхглубокая скважина)이라고 하는 이 프로젝트로 1970년에서 1992년까지 소련에서 12,262m를 팠다. 이후 2012년 8월 사할린의 Z-44 Chayvo 석유 시추공이 12,376m를 파면서 기록이 경신되었다.[2]
역사
콜라반도 북쪽에는 기원전 7-5천 년에 이미 정착되었다. 기원전 3-2천 년, 반도는 남쪽에서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에 의해 정착되었다. 서기 1천년 말까지 반도에는 자신의 국가가 없고 장로들이 통치하는 씨족에 거주하며 주로 순록 목축과 낚시에 종사하는 사미족만 이 정착했다. 12세기에 오네가만의 해안과 북부 드비나강 하류에서 온 러시아인 포모르족이 반도와 그곳의 사냥감과 풍부한물고기들을 발견했다. 포모르족은 정기적으로 사냥과 낚시를 하고 사미족과 물물교환을 시작했다. 그들은 테르스키 해안(Те́рский бе́рег), 반도의 백해 연안을 테르스카야 땅(Те́рская земля́)이라고 불렀다. 12세기 말, 포모르족은 반도의 모든 북쪽 해안을 탐험했고 핀마르크(노르웨이 북부의 지역)에 도달했고, 노르웨이인들은 그 지역에서 해군 경비대를 지원해야 했다. 포모르족 뒤에는 곧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공물 수집가들이 뒤따랐고 콜라 반도는 점차 노브고로드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을 공식화할 필요성이 명백해졌다. 노브고로드인들은 남쪽에서 온 카렐리아인들과 함께 현재 노르웨이의 일부인 야콥스강 근처의 바랑에르피요르드 해안 지역에 도달했으며 사미족들은 조공을 바쳐야 했다. 노르웨이인들은 또한 이 땅을 장악하려고 시도했고 이로 인해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1251년, 카렐리아인, 노브고로드인, 노르웨이 왕의 신하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노르웨이에 노브고로드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1251년 노르웨이와 사미 영토와 공물 수집 체계에 관한 최초의 조약이 노브고로드에서 체결되어 사미인들은 노브고로드와 노르웨이 모두에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조약의 조건에 따르면 노브고로드인들은 서쪽의 링겐 피오르드까지 사미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 있었고, 노르웨이인들은 터스키 해안의 동부를 제외한 콜라 반도 전체의 영토에서 조공을 모을 수 있었으며 조약에 의해 국경이 정해지지 않았다. 조약은 짧은 평화로 이어졌지만 곧 무력 충돌은 재개되었다. 연대기에 이르면 노브고로드인과 카렐리아인이 핀마크와 노르웨이 북부에서 1271년부터 14세기까지 계속된 공격을 기록하고 있다. 노브고로드 영토와 스웨덴 및 노르웨이 영토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은 1323년 8월 12일 노테보리 조약에 의해 확립되었다. 이 조약은 주로 카렐리야 지협 경계와 라도가 호수 북쪽 경계에 초점을 맞췄다. 북부 국경 문제를 다루는 또 다른 조약은 1326년 노르웨이와 체결된 노브고로드 조약으로 핀마르크에서 벌어진 수십 년간의 노르웨이-노브고로드 국경 교전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의 조건에 따라 노르웨이는 콜라반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 조약은 사미족이 노르웨이와 노브고로드 양쪽에 공물을 바치는 상황을 다루지 않았고, 그 관행은 1602년까지 계속 되었다. 1326년 조약은 국경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1323년 국경 획정을 확정하였고, 이후 600년 동안 1920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15세기에 노브고로드인들은 반도에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노브고로드인들의 첫 영구 정착지인 움바와 바르주가는 14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알리차강 서쪽에 있는 모든 해안 지역은 정착되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노브고로드인이었던 영토가 형성되었다. 행정적으로, 이 영토는 북부 드비나 지역에서 온 포사드니크에 의해 통치된 바르주즈스카야와 움브스카야 볼로스트로 분할되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1471년 셸론 전투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에 이 두 볼로스트의 통제권을 빼앗겼고, 1478년 이반 3세가 노브고로드 시를 점령하면서 공화국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콜라반도를 포함한 모든 노브고로드 영토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1471년 모스크바 대공국에 반도의 지배권을 빼앗겼지만 러시아의 이주는 멈추지 않았다. 16세기 동안 몇 개의 새로운 정착촌이 설립되었고, 사미족과 포모르족은 농노로 내몰렸다. 16세기 후반, 반도는 러시아의 차르돔 왕국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사이에 분쟁의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19세기 말까지 원주민 사미족은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새로 도착한 이즈마 코미족과 코미네츠족(일명 야란족)에 의해 대부분 북쪽으로 밀려났다. 이들은 백해 남동부의 그들의 고장에서 순록병 점염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 지역의 원래 행정 및 경제 중심지는 콜라 강 하구에 위치한 콜라였다. 1916년 로마노프나 무르마네(Romanov-na-Murmane, 현재의 무르만스크)가 세워졌고 순식간에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항구가 되었다.
러시아의 반도 이주는 칸달락샤(Kandalaksha )와 포랴구바(Porya-Guba)와 같은 새로운 정착촌이 생긴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콜라는 1565년에 처음 언급되었다. 15세기 말, 포모르족과 사미족은 대부분 수도원들에 의해 농노로 내몰렸다. 수도원 보티나는 17세기 동안 크게 확장되었지만, 1764년에 모든 콜라 반도 농부들이 국영 농민이 되면서 폐지되었다. 16세기 후반, 덴마크-노르웨이 왕 프레데릭 2세는 러시아의 차르돔에게 반도를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거절했고 적절한 방어를 조직하기 위해 보예보다(voyevoda)의 지위를 확립했다. 보예보다는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된 콜라에 자리 잡았다. 그 이전에는 칸달락샤의 세금 징수원이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새롭게 설립된 콜스키 지역(Kolsky Uyezd)은 반도의 대부분 영토와 카렐리아(Karelia)의 북부 지역부터 렌더리(Lendery)까지를 포괄했다. 경제 활동에도 불구하고 반도의 영구 정착은 1860년대까지 심하지 않았고 1917년까지 산발적으로 남아있었다. 1894년 반도는 러시아의 재무장관에 의해 방문되었고, 그는 이 지역의 경제적 잠재력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96년에는 전화와 전신선이 콜라까지 연장되어 본토와의 통신이 향상되었다. 철도의 건설 가능성도 검토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또한 1896년에 알렉산드로프스크(현재의 폴리아르니)가 설립되었고 매우 빠르게 규모가 커져서 1899년에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와 연합군 간의 통신이 두절되고 무르만 해안의 얼음 없는 항구가 동부 전선으로 전쟁 물자를 보내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게 되면서, 여전히 잘 개발되지 않은 반도는 갑자기 전략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1915년 3월, 철도의 건설이 서둘러졌고, 1916년 철도는 일부만 완공되고 부실하게 건설되었지만 빠르게 개통되었다. 1916년, 로마노프나 무르마네(현재의 무르만스크)가 새로운 철도의 종점으로 설립되었고 그 마을은 빠르게 성장하여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917년 11월 9일 반도 영토에 소련 권력이 수립되었으나 1918년 3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러시아의 전쟁 전 동맹군 이 영토를 점령했다. 알렉산드롭스키 우예즈드(Alexandrovsky Uyezd)는 1921년 6월 소련 정부에 의해 무르만스크주로 바뀌었다. 1927년 8월 1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는 레닌그라드주 설립과 레닌그라드주 오크루그의 국경과 구성에 대하여 두 가지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무르만스크 주는 6개 구역으로 분할되어 레닌그라드주로 편입되었다. 이 협정은 1938년 5월 28일 현대 무르만스크주로 탈바꿈할 때까지 존재했다. 대체로 소련 시대에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지만 대부분 인구가 철도와 연안의 도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시화된 지역 밖의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들은 대부분 사슴 목축을 위해 사용되었다. 1920-1940년, 키롭스크 마을과 몇몇 노동 정착촌이 반도에 세워졌다. 사미족은 1928-1930년에 그들의 순록 무리 중 절반 이상이 집단화되면서 강제적인 집단화의 대상이 되었다. 종래의 사미 목축은, 무료 목축보다 영속적인 정착을 중시하는 경제적 이익의 코미 어프로치를 위해 단계적으로 폐지되었다. 사미 문화는 목축 관행과 강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사미족의 언어와 전통적인 지식을 점차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부분의 사미는 러시아 사미족의 문화 중심지가 된 로보제로 마을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집단화에 저항하는 사미들은 강제 노동이나 죽음의 대상이 되었다. 사미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탄압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90년대에 사미족의 40%가 도시화된 지역에 살았지만, 일부는 지역 대부분에 순록을 몰고 다녔다.[3]
콜라 시추공
콜라 초심층 시추공(러시아어: Кольская сверхглубокая скважина)은 소련 콜라반도의 페첸스키구에서 진행된 과학 시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굴착된 시추공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구의 지각을 최대한 깊게 파보는 프로젝트였다. 1970년 5월 24일 굴착 장비인 Uralmash-4E를, 나중에는 Uralmash-15000 계열 장비를 이용하여 파내기 시작했다. 중앙 시추공을 원점으로 여러 시추공을 뚫는 방식이었는데, 가장 깊이 들어간 SG-3 구멍은 1989년 12,262m에 도달하여 현재까지 가장 깊이 들어간 구멍 중 하나로 계속 남아 있다. 순수 깊이만으로는 콜라 시추공이 지구상에서 가장 깊이 뚫린 구멍이다. 재정난으로 인해 2005년 폐쇄되었다. 모든 시추 및 연구 장비는 폐기되었고, 2008년 이후로는 방치되었다. 근 20년 동안에는 측정 깊이로도 세계에서 가장 깊은 시추공 중 하나였으나, 2008년 카타르에서 알샤헨 유정이 12,289m를 뚫고, 2011년 러시아의 사할린섬에서 사할린-I Odoptu OP-11 시추공이 12,345m 깊이의 구멍을 뚫으면서 이 기록은 깨지게 되었다.
콜라 시추공은 35km 깊이로 추정되는 페노스칸디아 대륙 지각의 3분의 1을 시추하여 가장 아랫부분의 바위는 25억년 나이의 시생누대 시기까지 도달했다. 이 프로젝트는 광범위한 지구물리학 연구에 사용되었다. 이 연구에서 언급된 영역은 페노스칸디아 지역의 심층 구조, 지구 지각의 지진학적 불연속면 및 열체제, 깊은 지각의 물리화학적 조성과 지각 상부에서 하부로의 전이 과정, 암석권의 지구물리학적 연구, 깊은 깊이의 지구물리학 연구 기술의 개발과 발전 등이 있었다. 과학자들에게 가장 매혹적이었던 연구 결과로는 지진파의 불연속(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이 나타나는 7km 지점에서 암석 물성이 화강암에서 현무암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불연속은 화강암의 변성암으로의 변이로 일어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그 깊이에서 암석은 완전히 파쇄되었고 물로 엄청나게 포화된 상태였다. 지상에서의 물과 달리 이 물은 깊은 지각의 광물로부터 왔으며 불투과성 암석층 때문에 표면까지 올라올 수 없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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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콜라반도〉, 《위키백과》
- 〈콜라 시추공〉, 《위키백과》
- 〈콜라 반도〉, 《요다위키》
- 〈콜라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