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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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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大韓帝國 高宗)
대례복을 입은 고종 황제
대한제국 태극기

대한제국 고종(大韓帝國 高宗, 1852년 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 혹은 간략히 고종(高宗)은 조선의 제26대 왕(재위 : 1863년 음력 12월 13일 ~ 1897년 10월 12일)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이다. 명성황후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광무개혁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간섭으로 국권을 상실하였다. 1919년 2월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1일 황제의 장례식에 맞춰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한 달 후인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고종이 만든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고종이 만든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에서도 계속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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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출생 및 가계

고종의 가계도

휘는 희(㷩),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兒名)은 명복(命福)이고 초자(初字)는 명부(明夫)이다. 재위 중의 연호는 개국(開國), 건양(建陽), 광무(光武)이다. 고종은 1852년(철종 3년) 9월 8일,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흥선군(興宣君)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으로서 민치구의 딸이며,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다음 날 고종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되어 양오라버니가 되는 민승호와, 임오군란 때 참살당하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지고 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4촌인 익평군의 아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로 압축되었다. 철종의 아들들은 전부 요절했으므로 흥선군은 익종 비 신정왕후 조씨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1863년(철종 14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과 대왕대비 조대비(趙大妃)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 왕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대한제국 고종(大韓帝國 高宗)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1868년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

국왕의 생부로서 섭정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벌열들을 가급적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기구로서 의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던 비변사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비변사에 집중되어 있던 정치, 군사적 기능을 양분하였다. 대원군은 붕당의 근거지로 오랫동안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철폐하였는데,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이어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군정의 문란을 시정 하기 위해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각 관청이 맡은 일과 세칙을 정리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였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회복을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상승을 초래하고, 원납전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성을 띤 기부금을 징수하였다.

고종 초기에 프랑스 군대와 미국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19세기 중반에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서학(천주교)과 동학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졌는데, 대대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1866년 1월,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에 위기를 느끼고 견제하고자, 프랑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프랑스 주교가 동의하지 않자, 정치적 이점을 얻을 수 없을거라 여겨,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도 수천인을 박해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남연군의 시신을 두고 협상하려 하였으나 회곽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묘지를 파지 못하고 실패에 그쳤다. 1871년(고종 8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수(帥)자기'를 탈취하였다. 미군이 탈취한 수자기는 현재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1]

재위 기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종황제 어진

개항과 친정

1869년 1월 31일(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말미암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에 의한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다.

강화도 조약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섯지만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1875년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영토 주권과 사법주권이 무시된 불평등 조약이며, 이 조약의 결과 부산(1876년), 원산(1880년), 인천(1883년)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개화정책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였으며,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하게 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위정척사운동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대원군 집권기부터 서양과의 통상 반대와 척화주전론이 제기되었는데, 대원군의 대외 정책과 맞물렸다. 하지만 대원군이 하야하고 정부가 개항과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최익현과 유인석 등의 유생들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과 개항불가론을 제기하였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보였으며, 정부는 1882년 4월, 서양의 나라들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임오군란

1882년(고종 19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는데, 이러한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 민씨 척족과 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이미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흥선대원군이 10년만에 재집권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복권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고문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는데, 마젠창과 위안스카이,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이 파견되었다.

갑신정변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과 박영효가 주축이 된 급진 개화파 등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켜 온건적인 개화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이궁시켜 다음과 같은 14개조 정강을 선포하였다.

을미사변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종용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찰나, 왕태자 척(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직후에 고종은 을미 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여 이들과 법부대신 장박을 포함한 다섯대신을 잡아 죽일것을 지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사실상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사업을 명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이 시기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1]

대한제국 성립

을사늑약이 조인된 덕수궁 중명전

대한제국 선포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9년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광무개혁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기치 하에 광무개혁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여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증강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반대하였기 때문에 고종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울릉도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902년에는 간도에 간도시찰원을, 1903년에는 이범윤간도관리사로 파견하였다. 행정개혁은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1901년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였다. 알렌의 소개로 에디슨의 회사에 전차와 전기에 대한 권리를 팔기도 하였다. 또한 1909년 당시 총리대신이 인력거를 탔다는 기록이 있고, 1911년에 대한제국 고종이 윗덮개가 없고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큰 미국산 포드형 승용차를 탔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대 중반까지도 나쁜 도로 사정 때문에 승용차가 서울의 상류층에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나, 1918년 한강 인도교를 가설한 후 212대로 그 대수가 늘어났다.[1]

재위 후반

러일전쟁과 국권 침탈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을사 늑약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은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으며, 이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하지만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늑약에 대한 반발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 강원도 삼척군과 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호머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다. 고종의 무효선언 발표는 다음 날 대한민국에서 을사조약의 무효, 불법성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強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고종의 무효선언서의 존재를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수교하는 조건으로 을사조약 무효, 파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그 후 정상수 명지대 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나타내는 독일어 전보를 발견하였다.[1]

퇴위 이후

1907년(융희 원년) 7월 24일,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요하였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다. 정미7조약의 체결과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였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어 덕수궁에 머물게 되었다. 1912년, 임병찬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결사단체인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왕정 복고를 내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고종의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지만,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3 · 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묘소는 홍릉이며, 묘호는 고종(高宗)이고 시호는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고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1]

고종과 서양문물

대한제국 고종 어차용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썼다고도 한다. 개화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적극적으로 애용했다. 사실 이것은 청나라의 광서제나 일본의 메이지 등 다른 군주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자동차

고종은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군주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 문화재 318호,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 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하며,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으며, 당시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음식

2017년, 창덕궁에서 '와플 틀'이 발굴되었다. 이와 동시에 '카스테라 틀'도 발견되어, 와플과 카스테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 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료로는 커피사이다를 마셨다고 하며, 특히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커피 애호가답게 커피 맛에도 굉장히 민감하여, 김홍륙 독다 사건 당시 아편을 탄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알고 바로 뱉어내 위험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순종황제는 커피가 처음이다보니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다량을 들이켜 구토와 피설사를 반복하다 기절하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몸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아이스크림도 먹었다고 하며, 외국 문물이 마구 들어오던 시대에 왕으로서 모든 것을 첫번째로 접했기 때문에 다양한 식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2]

각주

  1. 1.0 1.1 1.2 1.3 1.4 대한제국 고종〉, 《위키백과》
  2. 고종(대한제국)〉,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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