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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 + | {{동남유럽 위치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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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튀르키예어: İstanbul)은 [[튀르키예]]의 최대 도시이며 행정 구역상 [[이스탄불주]]에 속해 있다. 튀르키예 서부에 있고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다. 면적은 2,576㎢, 터키 인구의 19%를 차지하는 1,5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역사, 상업적인 중심지는 유럽 지구에 있으며, 인구의 1/3은 아시아 지구에 거주한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도시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A%A4%ED%83%84%EB%B6%88 이스탄불]〉, 《위키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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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 | 이스탄불은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 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금각만 사이에 위치한다. 이스탄불은 [[수도 (도시)|수도]]인 [[앙카라]]보다 거대하고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튀르키예의 최대도시이다. 위도는 북위 약 41도로, 한여름 평균 기온은 섭씨 29도, 한겨울 평균 기온은 4도이다. 사라이부르누(Sarayburnu)에 기원전 667년경에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래로, 이스탄불은 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동양과 서양이 이어져 만나는 곳으로,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이며 바스라와 바그다드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이스탄불은 또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기독교의 3대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거의 1600년 동안 여러 국가의 수도였다. 오랫동안 로마 제국(330년~1204년, 1261년~1453년)의 수도였고, 잠시 라틴 제국(1204년~1261년)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Konstantinoúpolis; 라틴어: Constantinopolis)의 함락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1453년 ~ 1922년)도 수도로 정했다. 1922년까지 아나톨리아반도를 지배한 국가의 수도였으나,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과 함께 수도가 앙카라로 이전되었고 이스탄불(Istanbul)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이스탄불을 구성하는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는 2㎞ 길이의 유라시아 해저터널(Eurasia Tunnel)로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 1882년부터 1977년까지 운행한 파리~이스탄불을 연결하는 오리엔트특급 열차의 종착역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정교의 본산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거대도시에 걸맞게 35개가 넘는 대학교를 가지고 있다. 이스탄불 기술 대학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공학과 과학 분야에서 유명하다. 이외에도 도시 전 지역에 12개 이상의 캠퍼스를 보유한 대규모의 마르마라 대학교(Marmara University), 1453년에 설립되어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이스탄불대학교 등이 있다. 이스탄불대학교의 도서관은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 제국과 관련된 주요 역사적 문서를 보관하고 있어 세계 연구 연구자들이 많이 찾는다. 이와 함께 토프카프 왕궁박물관(Topkapi Palace Library)이나 해군박물관(Naval Museum Library) 역시 중요한 역사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2010년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고, 2012년 유럽의 스포츠 수도로 지정되었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4980&cid=40942&categoryId=34070 이스탄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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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칭== | ||
+ |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중세 그리스어로 “이스 틴 폴린”(εἰς τὴν Πόλιν, ([is tim ˈbolin]): “도시(都市)로”)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이스탄불을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또는 간단하게 “(그) 도시”(Η πολή)라고 부르는데,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천 년 넘게 그리스 세계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소재지인 역사적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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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에서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은 1924년부터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고, 널리 쓰여 대중들 머릿속에 굳어진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터키식으로 바꾼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라는 이름이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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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 및 기후== | ||
+ |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해협]]이 [[마르마라해]]와 만나는 골든 혼 북쪽에서 시작되어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골든 혼은 이스탄불에 도시 곳곳을 연결해 주는 수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무역과 방어를 위한 최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이스탄불은 터키의 북서쪽의 마르마라 지역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5,343km²이다. 동북쪽 [[흑해]] 방향으로는 [[아나톨리아반도]] 북쪽에서 흑해를 따라 위치한 폰투스산맥의 지류를 이루는 크고 작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다. 지형은 수십 개의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높은 언덕인 아이도스(Aydos)는 해발 537m에 이른다. 도시 중간에 위치한 보스포러스 해협이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나눈다. 또한 금각만은 옛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던 파티흐(Fatih) 지역과 탁심 광장이 위치한 신시가지 지역인 베이욜루 지역을 나눈다. 아시아 지구는 위스퀴다르, 카디쾨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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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의 일곱 언덕처럼 이스탄불 역시 옛 비잔티움 지역도 이스탄불의 일곱 언덕이라 불리는 언덕이 곳곳에 분포돼있다. 각각의 언덕에는 오스만제국이 세운 모스크가 있다. 언덕 최동단에는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사라이부루누가 있다. 이스탄불 주변의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은 오랜 기간 동안 외부의 침략에서 이스탄불을 막아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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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은 마르마라해 해안선을 따라서는 [[지중해성기후]]를 보이고, 동쪽으로 흑해까지는 습한 [[아열대]]기후를 나타낸다. 동쪽의 높은 산지에서는 해양성기후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겨울은 시원한 편이고 여름은 약간 더운 날씨를 보이지만 언덕이 많은 지형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강수량의 경우 연평균 강수량은 849㎜ 정도이지만 해안지대에서는 비가 적게 내리고, 동쪽 산간 지역에서는 1,000㎜가 넘는 강수량을 보이기도 한다. 흑해 쪽 지역에서는 호수가 만들어내는 수증기로 인해 겨울에 많은 눈이 내리기도 한다. 7월과 8월 기온은 22~23℃ 사이로 따뜻한 편이지만 간혹 40℃를 넘길 때도 있다. 겨울에는 2월이 가장 추운데 12월부터 3월 사이가 약 2.9~5.5℃ 정도로 온난한 편이지만 영하 10℃ 이하로 혹한의 추위를 보이는 일도 종종 있다. 비는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월평균 100㎜ 이상 내리고 4월부터 9월까지는 월평균 50㎜ 이하로 내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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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
+ | ===고대=== | ||
+ | 터키 정부는 최근 마르마라이 터널 공사 중 이스탄불 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발굴하였다. 기원전 657년 고대 [[그리스]] 메가라의 식민지로 건설되고 그들의 왕 비자스의 이름을 따 비잔티온이라 불렸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거쳤고, 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자치 도시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 이름인 비잔티움으로 불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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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년 비잔티움은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비루스와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항쟁에 휘말려 황제군 손에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몇 년 후 훨씬 크게 재건되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330년 5월 11일 이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선포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라틴인들이 정복하여 잠시 라틴 제국을 세웠다. 1261년 로마 제국의 계승국 중 하나인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 로마 제국을 재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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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라틴 제국의 지배 여파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교회, 방어 시설, 기본 서비스 등이 모두 파손됐고, 인구는 40만 명 정도(950년)에서 4만 명까지 줄어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라틴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특히 오스만 제국에 부단히 위협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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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53년 로마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그칠 정도로 매우 줄어들었고 5월 29일 마침내 오스만에게 동로마가 소멸당하고 2000여 년 역사에 종말을 고했다. | ||
+ | ===오스만 제국=== | ||
+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즉시 천도하고, 정교회의 아야소피아를 포함한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개조했다. | ||
+ | |||
+ | 그는 도시 재건을 위해 병원, 학교, 상업 지구를 대거 건설하고 로마 제국이 만든 수도를 보수하는 등 도시 인프라를 부활시켰다. 피정복자였던 기독교도에게는 딤미(공인 이교도)로서 일정한 자유를 보장해 주어 도시에 계속 살게 해 주는 한편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각 구역에는 술탄이나 귀족 같은 유력자가 설립한 모스크와 공공 시설이 설립·정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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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교도에 의한 차별과 억압은 있었지만, 기독교인 교회와 유대인 회당도 어느 정도 유지되어 이스탄불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튀르크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서유럽 각국에서 온 상인과 사절 등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다문화 도시이자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도약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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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8년 황제가 머무는 톱카프 궁전이 완공되었다. 톱카프는 대포의 문이라는 뜻이다. 부지 면적이 모두 7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궁전은 이후에도 증개축을 반복하면서 중동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섞인 독특한 건물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지중해와 발칸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하면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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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0년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1557년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술레이마니예 모스크가 이스탄불 중심부에 건설됐다. 쉴레이만 1세의 이름을 딴 이 모스크는 높이 54미터, 직경 27미터의 거대한 돔을 만들고 건물을 에워싼 네 개의 미나레트 표면도 치밀하게 장식했다. 16세기에 이스탄불 인구는 70만 명에 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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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16년에는 시난의 문하생인 메메트 아아가 건축을 담당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통칭 블루 모스크)가 완성됐다. 통상적으로 모스크에는 건물을 둘러싼 첨탑을 네 개까지 만들지만 이 모스크에는 여섯 개를 세웠다.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성지 메카에 있는 모스크보다 더 많은 첨탑을 세운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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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이후, 서구 국가들의 주요 교역 활동 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지중해 도시들의 중요성이 약해졌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여전히 서구 열강들의 중동 진출 거점으로 주목받았다. 1883년 이스탄불에서 [[독일]]의 [[뮌헨]], [[프랑스]] [[파리 (도시)|파리]]를 잇는 오리엔트 급행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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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자 [[영국]], [[프랑스]], [[그리스]] 등 연합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했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등이 이끄는 국민군이 맞서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결국 오스만제국은 해체되었다. | ||
+ | ===터키 공화국=== | ||
+ | 터키 공화국이 설립된 후 1923년 수도를 [[아나톨리아반도]] 내륙에 있는 도시 앙카라에 내주게 됐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1600년 만에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터키 최대 인구의 상업 도시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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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이스탄불은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쓰였고, 서구에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1924년에 와서야 이스탄불은 이 도시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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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이스탄불은 현대화된 도시로 탈바꿈했다. 광장, 대로, 길이 새로 건설됐다. 1970년대부터 아나톨리아 지방의 농촌인들이 이주하면서 이스탄불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도시 외곽에 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ref>〈[https://yoda.wiki/wiki/Istanbul 이스탄불]〉, 《요다위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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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통== | ||
+ | 이스탄불에는 화물 전용 [[공항]]을 포함해 총 3개의 공항이 있다. 가장 큰 공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으로 시의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약 63㎞ 떨어진 [[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철도편은 없고 하바쉬(Havaş)라고 부르는 공항버스나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두 번째 공항은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으로 이스탄불 시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45㎞ 떨어진 지점에 있다. 2018년 총 수송객이 약 3.400만 명으로 튀르키예에서도 큰 공항 중 하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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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에는 네 개의 주요 [[철도]]역이 있는데 [[유럽]] 쪽에 두 개, [[아시아]] 쪽에 두 개의 역이 있다. 유럽 쪽에는 파티흐 지구에 있는 시르케지역(Sirkeci Terminal)과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27㎞ 떨어진 할칼리(Halkali)역이 있다. 아시아 쪽으로는 파티흐 지구와 해저터널로 연결되는 아시아쪽인 위키스다르 지구의 출구 쪽에 있는 하이다르파샤역(Haydarpaşa Terminal)과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4㎞ 아래에 위치한 쇠귀틀뤼체스메역(Söğütlüçeşme railway station)이다. 시르케지역은 이스탄불에서 최초로 국제선 열차를 운행한 곳으로 1833년부터 1977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운행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orient Express)의 종착역이었다. 과거에는 유럽 쪽 이스탄불에서 앙카라 등 튀르키예로 가기 위해서는 시르케지 역에서 내려 하이다르파샤 역까지 배를 타고 이동해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2019년 3월 이후에는 해저터널의 개통으로 유럽 쪽에서 아시아 쪽으로 바로 갈 수 있다. 튀르키예 철도는 현재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고속열차(Ankara–Istanbul high-speed railway)를 운행하고 있으며 이스탄불의 종착역은 할칼리역이다. 이곳에서 북쪽 그리스나 불가리아 등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반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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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탄불은 직선도로가 많지 않고 좁은 도로 때문에 시내에서는 잦은 교통체증이 발생한다. 시내에서는 통근열차, 트램, [[지하철]], 버스, 광역직행버스, 페리 등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다. 2009년부터 모든 대중교통의 요금체계가 통합되어 악빌(Akbil)이라는 티켓으로 할인받을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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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램은 과거에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지만 1966년 대부분의 노선이 폐지되고 현재는 카바타스(Kabatas)에서 박실라르(Bagsilar)까지 운행하는 노선과 탁심 광장에서 튀넬(Tünel)까지 운행하는 노선만 남아있다. 이곳 튀넬에서 남동쪽 해변의 카라쾨이(Karaköy)까지는 길이가 573m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지하철이 놓여있다. 이스탄불은 6개 노선(유럽 측의 M1, M2, M3 및 M6, 아시아 측의 M4 및 M5)의 지하철을 운행하고 있다. 2020년 현재 4개의 노선(M7, M8, M9 및 M11)을 추가로 건설하고 있고, M3와 M4의 연장선도 공사 중에 있다. 이밖에 유럽 쪽과 아시아 쪽을 연결하는 마르마라이선이 각 지역의 지하철역들을 연결하고 있다. 유럽 쪽과 아시아 쪽을 오가기 위해서는 마르마라이선 이외에 바푸르(Vapur)라 불리는 배를 이용할 수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49575&cid=40942&categoryId=32185 이스탄불의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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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 | ||
+ | 동서문명의 각축장이자 교차로였던 이스탄불은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이 남겨놓은 많은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로마제국과 동방정교 비잔틴제국의 유산들은 이슬람 오스만제국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이슬람화되었지만 파티흐 지구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성벽, 발렌스 황제의 수로(Aqueduct of Valens), 마르키아누스 황제(Flavius Marcianus)에게 헌정된 기둥, 원형경기장(Hippodrome of Constantinople), 아야 소피아 성당 등이 남아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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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도시인 파티흐 지구 전체를 감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콘스탄티노플 성벽(Walls of Constantinople)은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된 비잔틴 제국의 유산이다. 성벽은 바다 방향 삼 면과 서북쪽 육지의 경계를 감싸 이스탄불을 견고한 성채로 만들었다. 특히 육지 방향 6㎞는 해자를 두고 해자 뒤에 흉벽을 쌓았다. 이 성벽의 육지 쪽에는 황금의 문(Golden Gate)이라는 출입문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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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교회들은 대부분 이슬람 사원이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파티예 사원(Fethiye Cami)은 파마카리스토스 교회(Pammakaristos Church)라는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교회당이었으며,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은 11세기에 지어진 동방정교회 수도원의 부속 성당이었다. 귈 사원(Gül Camii)과 몰라 페르나리 이사 사원(Molla Fenâri Îsâ Câmîi) 역시 비잔틴 시대 동방정교회의 성당이었다. 또한 13세기 후반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건축된 궁전은 텍푸르 사라이 박물관(Tekfur Sarayı Müzesi)으로 운영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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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직후 그들은 종교활동을 위해 기존 동방정교회의 교회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었다. 이후에는 도시 곳곳에 수많은 이슬람 사원들을 직접 건축했다. 사원 건축에는 대부분 시난(Sinan)이라는 성을 가진 건축가들이 참여했는데, 대표적으로 아틱 시난(Atik Sinan), 발리케시르 시난(Balıkesir Sinan), 미마르 코카 시난(Mimar Koca Sinan) 등이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적 전통에 비잔틴적 요소를 혼합해 사원을 만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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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만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원은 쉴레마니예 모스크, 푸른 사원(Blue Mosque)으로 알려진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파티흐 모스크, 돌마바흐체 사원(Dolmabahçe Mosque) 등이다. 파티흐 지구 아타튀르크 대교와 갈라타 다리 중간 지점에 있는 쉴레마니예 모스크는 16세기 중반에 건설된 것으로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 중 하나이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 내부가 온통 푸른색의 타일과 유리로 되어 있어 푸른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사원이 일반적으로 4개의 미나레트(minaret)를 가지는 것과는 달리 이 사원은 6개의 미나레트를 가지고 있다. 이밖에 18세기 중반에 바로코 이슬람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파티흐 사원과 19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돌마바체 사원 등이 있다. 이밖에 이슬람식 건축양식은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술탄의 거주지로 사용된 톱카피 궁전(Topkapı Palace), 베이레르베이 궁전(Beylerbeyi Palace),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Palace), 이디즈 궁전(Yıldız)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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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사원이나 궁전 이외에 방문할만한 장소는 14세기 제노아인들이 세운 갈라타 타워, 호텔, 상점, 레스토랑 등이 몰려있어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지라 불리는 탁심 광장, 토프카프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keoloji Müzeleri) 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개장한 고고학 박물관은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아시아 문명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 | ||
+ | |||
+ | 파티흐 지구에 있는 카팔르차르슈(Kapalıçarşı)라 부르는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트 시장(Egyptian Bazaar)이란 의미의 므스르 차르슈(Mısır Çarşısı)도 방문할 가치가 있다. 특히 튀르키예 전통시장에 해당하는 그랜드 바자르는 매년 1억 명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 ||
+ | ===축제=== | ||
+ | 국제적으로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축제는 이스탄불 튤립축제로, 튤립은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오늘날 튀르키예의 국화이자 이스탄불의 상징이다. 해마다 4월 1일부터 시작되며 축제기간 동안 이스탄불 전역에 300만 송이 이상의 튤립이 개화한다. 이밖에 6월 말에서 7월 중순에 열리는 국제 재즈 페스티벌, 7월에 개최되는 보스포루스해협 횡단 수영대회 역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축제이다.<ref>〈[https://namu.wiki/w/%EC%9D%B4%EC%8A%A4%ED%83%84%EB%B6%88 이스탄불]〉, 《나무위키》</ref> | ||
== 지도 == | == 지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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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 국가 지도}} | |{{서아시아 국가 지도}}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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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영상== | ||
+ | <youtube>c7_Lv5htN5Q</youtube> | ||
+ | <youtube>k4vCGr7I3Lo</youtub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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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 | |||
+ | ==참고자료==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A%A4%ED%83%84%EB%B6%88 이스탄불]〉, 《위키백과》 | ||
+ | * 〈[https://namu.wiki/w/%EC%9D%B4%EC%8A%A4%ED%83%84%EB%B6%88 이스탄불]〉, 《나무위키》 | ||
+ | * 〈[https://yoda.wiki/wiki/Istanbul 이스탄불]〉, 《요다위키》 | ||
+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4980&cid=40942&categoryId=34070 이스탄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49575&cid=40942&categoryId=32185 이스탄불의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 ||
== 같이 보기 == | == 같이 보기 == | ||
* [[튀르키예]] | * [[튀르키예]] | ||
+ | * [[마르마라해]] | ||
+ | * [[흑해]] | ||
+ | * [[보스포루스 해협]] | ||
* [[앙카라]] | * [[앙카라]] | ||
* [[오스만투르크]] | * [[오스만투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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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튀르키예어: İstanbul)은 튀르키예의 최대 도시이며 행정 구역상 이스탄불주에 속해 있다. 튀르키예 서부에 있고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다. 면적은 2,576㎢, 터키 인구의 19%를 차지하는 1,5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역사, 상업적인 중심지는 유럽 지구에 있으며, 인구의 1/3은 아시아 지구에 거주한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도시이다.[1]
목차
개요[편집]
이스탄불은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선 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금각만 사이에 위치한다. 이스탄불은 수도인 앙카라보다 거대하고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튀르키예의 최대도시이다. 위도는 북위 약 41도로, 한여름 평균 기온은 섭씨 29도, 한겨울 평균 기온은 4도이다. 사라이부르누(Sarayburnu)에 기원전 667년경에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래로, 이스탄불은 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동양과 서양이 이어져 만나는 곳으로,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이며 바스라와 바그다드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이스탄불은 또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기독교의 3대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거의 1600년 동안 여러 국가의 수도였다. 오랫동안 로마 제국(330년~1204년, 1261년~1453년)의 수도였고, 잠시 라틴 제국(1204년~1261년)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그리스어: 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 Konstantinoúpolis; 라틴어: Constantinopolis)의 함락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1453년 ~ 1922년)도 수도로 정했다. 1922년까지 아나톨리아반도를 지배한 국가의 수도였으나,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과 함께 수도가 앙카라로 이전되었고 이스탄불(Istanbul)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이스탄불을 구성하는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는 2㎞ 길이의 유라시아 해저터널(Eurasia Tunnel)로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 1882년부터 1977년까지 운행한 파리~이스탄불을 연결하는 오리엔트특급 열차의 종착역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정교의 본산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거대도시에 걸맞게 35개가 넘는 대학교를 가지고 있다. 이스탄불 기술 대학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공학과 과학 분야에서 유명하다. 이외에도 도시 전 지역에 12개 이상의 캠퍼스를 보유한 대규모의 마르마라 대학교(Marmara University), 1453년에 설립되어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이스탄불대학교 등이 있다. 이스탄불대학교의 도서관은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 제국과 관련된 주요 역사적 문서를 보관하고 있어 세계 연구 연구자들이 많이 찾는다. 이와 함께 토프카프 왕궁박물관(Topkapi Palace Library)이나 해군박물관(Naval Museum Library) 역시 중요한 역사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2010년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고, 2012년 유럽의 스포츠 수도로 지정되었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2]
명칭[편집]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중세 그리스어로 “이스 틴 폴린”(εἰς τὴν Πόλιν, ([is tim ˈbolin]): “도시(都市)로”)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이스탄불을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또는 간단하게 “(그) 도시”(Η πολή)라고 부르는데,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천 년 넘게 그리스 세계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의 소재지인 역사적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터키에서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은 1924년부터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이 되었고, 널리 쓰여 대중들 머릿속에 굳어진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터키식으로 바꾼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라는 이름이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지리 및 기후[편집]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해협이 마르마라해와 만나는 골든 혼 북쪽에서 시작되어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골든 혼은 이스탄불에 도시 곳곳을 연결해 주는 수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무역과 방어를 위한 최상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이스탄불은 터키의 북서쪽의 마르마라 지역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5,343km²이다. 동북쪽 흑해 방향으로는 아나톨리아반도 북쪽에서 흑해를 따라 위치한 폰투스산맥의 지류를 이루는 크고 작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다. 지형은 수십 개의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높은 언덕인 아이도스(Aydos)는 해발 537m에 이른다. 도시 중간에 위치한 보스포러스 해협이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나눈다. 또한 금각만은 옛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던 파티흐(Fatih) 지역과 탁심 광장이 위치한 신시가지 지역인 베이욜루 지역을 나눈다. 아시아 지구는 위스퀴다르, 카디쾨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로마의 일곱 언덕처럼 이스탄불 역시 옛 비잔티움 지역도 이스탄불의 일곱 언덕이라 불리는 언덕이 곳곳에 분포돼있다. 각각의 언덕에는 오스만제국이 세운 모스크가 있다. 언덕 최동단에는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사라이부루누가 있다. 이스탄불 주변의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은 오랜 기간 동안 외부의 침략에서 이스탄불을 막아 주었다.
이스탄불은 마르마라해 해안선을 따라서는 지중해성기후를 보이고, 동쪽으로 흑해까지는 습한 아열대기후를 나타낸다. 동쪽의 높은 산지에서는 해양성기후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겨울은 시원한 편이고 여름은 약간 더운 날씨를 보이지만 언덕이 많은 지형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강수량의 경우 연평균 강수량은 849㎜ 정도이지만 해안지대에서는 비가 적게 내리고, 동쪽 산간 지역에서는 1,000㎜가 넘는 강수량을 보이기도 한다. 흑해 쪽 지역에서는 호수가 만들어내는 수증기로 인해 겨울에 많은 눈이 내리기도 한다. 7월과 8월 기온은 22~23℃ 사이로 따뜻한 편이지만 간혹 40℃를 넘길 때도 있다. 겨울에는 2월이 가장 추운데 12월부터 3월 사이가 약 2.9~5.5℃ 정도로 온난한 편이지만 영하 10℃ 이하로 혹한의 추위를 보이는 일도 종종 있다. 비는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월평균 100㎜ 이상 내리고 4월부터 9월까지는 월평균 50㎜ 이하로 내린다.
역사[편집]
고대[편집]
터키 정부는 최근 마르마라이 터널 공사 중 이스탄불 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발굴하였다. 기원전 657년 고대 그리스 메가라의 식민지로 건설되고 그들의 왕 비자스의 이름을 따 비잔티온이라 불렸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거쳤고, 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자치 도시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라틴어 이름인 비잔티움으로 불렸다.
196년 비잔티움은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비루스와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항쟁에 휘말려 황제군 손에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몇 년 후 훨씬 크게 재건되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330년 5월 11일 이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선포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라틴인들이 정복하여 잠시 라틴 제국을 세웠다. 1261년 로마 제국의 계승국 중 하나인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 로마 제국을 재건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지배 여파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교회, 방어 시설, 기본 서비스 등이 모두 파손됐고, 인구는 40만 명 정도(950년)에서 4만 명까지 줄어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라틴인,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특히 오스만 제국에 부단히 위협받았다.
1453년 로마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에 그칠 정도로 매우 줄어들었고 5월 29일 마침내 오스만에게 동로마가 소멸당하고 2000여 년 역사에 종말을 고했다.
오스만 제국[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즉시 천도하고, 정교회의 아야소피아를 포함한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개조했다.
그는 도시 재건을 위해 병원, 학교, 상업 지구를 대거 건설하고 로마 제국이 만든 수도를 보수하는 등 도시 인프라를 부활시켰다. 피정복자였던 기독교도에게는 딤미(공인 이교도)로서 일정한 자유를 보장해 주어 도시에 계속 살게 해 주는 한편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던 이슬람교도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각 구역에는 술탄이나 귀족 같은 유력자가 설립한 모스크와 공공 시설이 설립·정비되었다.
이슬람교도에 의한 차별과 억압은 있었지만, 기독교인 교회와 유대인 회당도 어느 정도 유지되어 이스탄불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튀르크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서유럽 각국에서 온 상인과 사절 등 여러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다문화 도시이자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도약했다.
1478년 황제가 머무는 톱카프 궁전이 완공되었다. 톱카프는 대포의 문이라는 뜻이다. 부지 면적이 모두 7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궁전은 이후에도 증개축을 반복하면서 중동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섞인 독특한 건물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지중해와 발칸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하면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520년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1557년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한 술레이마니예 모스크가 이스탄불 중심부에 건설됐다. 쉴레이만 1세의 이름을 딴 이 모스크는 높이 54미터, 직경 27미터의 거대한 돔을 만들고 건물을 에워싼 네 개의 미나레트 표면도 치밀하게 장식했다. 16세기에 이스탄불 인구는 70만 명에 달했다.
1616년에는 시난의 문하생인 메메트 아아가 건축을 담당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통칭 블루 모스크)가 완성됐다. 통상적으로 모스크에는 건물을 둘러싼 첨탑을 네 개까지 만들지만 이 모스크에는 여섯 개를 세웠다.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성지 메카에 있는 모스크보다 더 많은 첨탑을 세운 것이다.
17세기 이후, 서구 국가들의 주요 교역 활동 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지중해 도시들의 중요성이 약해졌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여전히 서구 열강들의 중동 진출 거점으로 주목받았다. 1883년 이스탄불에서 독일의 뮌헨, 프랑스 파리를 잇는 오리엔트 급행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자 영국, 프랑스, 그리스 등 연합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했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등이 이끄는 국민군이 맞서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황제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결국 오스만제국은 해체되었다.
터키 공화국[편집]
터키 공화국이 설립된 후 1923년 수도를 아나톨리아반도 내륙에 있는 도시 앙카라에 내주게 됐다. 이로써 이스탄불은 1600년 만에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터키 최대 인구의 상업 도시가 되었다.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이스탄불은 그리스어 이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쓰였고, 서구에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1924년에 와서야 이스탄불은 이 도시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이스탄불은 현대화된 도시로 탈바꿈했다. 광장, 대로, 길이 새로 건설됐다. 1970년대부터 아나톨리아 지방의 농촌인들이 이주하면서 이스탄불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도시 외곽에 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3]
교통[편집]
이스탄불에는 화물 전용 공항을 포함해 총 3개의 공항이 있다. 가장 큰 공항은 아타튀르크국제공항으로 시의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약 63㎞ 떨어진 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철도편은 없고 하바쉬(Havaş)라고 부르는 공항버스나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두 번째 공항은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으로 이스탄불 시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45㎞ 떨어진 지점에 있다. 2018년 총 수송객이 약 3.400만 명으로 튀르키예에서도 큰 공항 중 하나이다.
이스탄불에는 네 개의 주요 철도역이 있는데 유럽 쪽에 두 개, 아시아 쪽에 두 개의 역이 있다. 유럽 쪽에는 파티흐 지구에 있는 시르케지역(Sirkeci Terminal)과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27㎞ 떨어진 할칼리(Halkali)역이 있다. 아시아 쪽으로는 파티흐 지구와 해저터널로 연결되는 아시아쪽인 위키스다르 지구의 출구 쪽에 있는 하이다르파샤역(Haydarpaşa Terminal)과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1.4㎞ 아래에 위치한 쇠귀틀뤼체스메역(Söğütlüçeşme railway station)이다. 시르케지역은 이스탄불에서 최초로 국제선 열차를 운행한 곳으로 1833년부터 1977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운행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orient Express)의 종착역이었다. 과거에는 유럽 쪽 이스탄불에서 앙카라 등 튀르키예로 가기 위해서는 시르케지 역에서 내려 하이다르파샤 역까지 배를 타고 이동해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2019년 3월 이후에는 해저터널의 개통으로 유럽 쪽에서 아시아 쪽으로 바로 갈 수 있다. 튀르키예 철도는 현재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고속열차(Ankara–Istanbul high-speed railway)를 운행하고 있으며 이스탄불의 종착역은 할칼리역이다. 이곳에서 북쪽 그리스나 불가리아 등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반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이스탄불은 직선도로가 많지 않고 좁은 도로 때문에 시내에서는 잦은 교통체증이 발생한다. 시내에서는 통근열차, 트램, 지하철, 버스, 광역직행버스, 페리 등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다. 2009년부터 모든 대중교통의 요금체계가 통합되어 악빌(Akbil)이라는 티켓으로 할인받을 수 있다.
트램은 과거에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지만 1966년 대부분의 노선이 폐지되고 현재는 카바타스(Kabatas)에서 박실라르(Bagsilar)까지 운행하는 노선과 탁심 광장에서 튀넬(Tünel)까지 운행하는 노선만 남아있다. 이곳 튀넬에서 남동쪽 해변의 카라쾨이(Karaköy)까지는 길이가 573m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지하철이 놓여있다. 이스탄불은 6개 노선(유럽 측의 M1, M2, M3 및 M6, 아시아 측의 M4 및 M5)의 지하철을 운행하고 있다. 2020년 현재 4개의 노선(M7, M8, M9 및 M11)을 추가로 건설하고 있고, M3와 M4의 연장선도 공사 중에 있다. 이밖에 유럽 쪽과 아시아 쪽을 연결하는 마르마라이선이 각 지역의 지하철역들을 연결하고 있다. 유럽 쪽과 아시아 쪽을 오가기 위해서는 마르마라이선 이외에 바푸르(Vapur)라 불리는 배를 이용할 수 있다.[4]
관광[편집]
동서문명의 각축장이자 교차로였던 이스탄불은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이 남겨놓은 많은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로마제국과 동방정교 비잔틴제국의 유산들은 이슬람 오스만제국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이슬람화되었지만 파티흐 지구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성벽, 발렌스 황제의 수로(Aqueduct of Valens), 마르키아누스 황제(Flavius Marcianus)에게 헌정된 기둥, 원형경기장(Hippodrome of Constantinople), 아야 소피아 성당 등이 남아있다.
구도시인 파티흐 지구 전체를 감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콘스탄티노플 성벽(Walls of Constantinople)은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된 비잔틴 제국의 유산이다. 성벽은 바다 방향 삼 면과 서북쪽 육지의 경계를 감싸 이스탄불을 견고한 성채로 만들었다. 특히 육지 방향 6㎞는 해자를 두고 해자 뒤에 흉벽을 쌓았다. 이 성벽의 육지 쪽에는 황금의 문(Golden Gate)이라는 출입문이 있다.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교회들은 대부분 이슬람 사원이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파티예 사원(Fethiye Cami)은 파마카리스토스 교회(Pammakaristos Church)라는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교회당이었으며,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은 11세기에 지어진 동방정교회 수도원의 부속 성당이었다. 귈 사원(Gül Camii)과 몰라 페르나리 이사 사원(Molla Fenâri Îsâ Câmîi) 역시 비잔틴 시대 동방정교회의 성당이었다. 또한 13세기 후반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건축된 궁전은 텍푸르 사라이 박물관(Tekfur Sarayı Müzesi)으로 운영되고 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직후 그들은 종교활동을 위해 기존 동방정교회의 교회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었다. 이후에는 도시 곳곳에 수많은 이슬람 사원들을 직접 건축했다. 사원 건축에는 대부분 시난(Sinan)이라는 성을 가진 건축가들이 참여했는데, 대표적으로 아틱 시난(Atik Sinan), 발리케시르 시난(Balıkesir Sinan), 미마르 코카 시난(Mimar Koca Sinan) 등이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적 전통에 비잔틴적 요소를 혼합해 사원을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사원은 쉴레마니예 모스크, 푸른 사원(Blue Mosque)으로 알려진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파티흐 모스크, 돌마바흐체 사원(Dolmabahçe Mosque) 등이다. 파티흐 지구 아타튀르크 대교와 갈라타 다리 중간 지점에 있는 쉴레마니예 모스크는 16세기 중반에 건설된 것으로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 중 하나이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 내부가 온통 푸른색의 타일과 유리로 되어 있어 푸른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사원이 일반적으로 4개의 미나레트(minaret)를 가지는 것과는 달리 이 사원은 6개의 미나레트를 가지고 있다. 이밖에 18세기 중반에 바로코 이슬람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파티흐 사원과 19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돌마바체 사원 등이 있다. 이밖에 이슬람식 건축양식은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술탄의 거주지로 사용된 톱카피 궁전(Topkapı Palace), 베이레르베이 궁전(Beylerbeyi Palace),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Palace), 이디즈 궁전(Yıldız) 등이 있다.
이슬람 사원이나 궁전 이외에 방문할만한 장소는 14세기 제노아인들이 세운 갈라타 타워, 호텔, 상점, 레스토랑 등이 몰려있어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지라 불리는 탁심 광장, 토프카프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keoloji Müzeleri) 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개장한 고고학 박물관은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아시아 문명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
파티흐 지구에 있는 카팔르차르슈(Kapalıçarşı)라 부르는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트 시장(Egyptian Bazaar)이란 의미의 므스르 차르슈(Mısır Çarşısı)도 방문할 가치가 있다. 특히 튀르키예 전통시장에 해당하는 그랜드 바자르는 매년 1억 명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축제[편집]
국제적으로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축제는 이스탄불 튤립축제로, 튤립은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오늘날 튀르키예의 국화이자 이스탄불의 상징이다. 해마다 4월 1일부터 시작되며 축제기간 동안 이스탄불 전역에 300만 송이 이상의 튤립이 개화한다. 이밖에 6월 말에서 7월 중순에 열리는 국제 재즈 페스티벌, 7월에 개최되는 보스포루스해협 횡단 수영대회 역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축제이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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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이스탄불〉, 《위키백과》
- 〈이스탄불〉, 《나무위키》
- 〈이스탄불〉, 《요다위키》
- 〈이스탄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이스탄불의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아나톨리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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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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