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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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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고개

미아리고개서울특별시의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개요[편집]

  • 미아리고개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고개이다. 돈암동 고개·돈암현(敦岩峴)이라고도 한다. 돈암동에서 길음동(吉音洞)으로 넘어가는 미아로에 있다. 옛날에는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에 침입하였으므로 되너미고개라고 불렀으며, 한자명으로는 적유령(狄逾嶺)이라 하였다. 또 6 ·25전쟁 때에는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이 고개를 넘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갔다. 이 고개에 얽힌 사연을 내용으로 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이다.[1]
  • 미아리고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고개이다. 돈암동 고개 혹은 돈암현이라고도 하며, 돈암동과 길음동 사이의 미아로에 존재한다. 미아로는 돈암동로터리를 기점으로 돈암동, 길음동을 동북방향으로 뻗어 미아사거리까지 폭 25m, 길이 1.5km이다. 서울 지하철 4호선 길음역과 성신여대입구역이 근처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도 가족들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이러한 일화를 바탕으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트로트곡도 발표되었다. 미아리고개에서 돈암동으로 가는 길 사이에 미아리 점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1960년대에서부터 자리 잡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는 100여 개 이상의 점집들로 이루어졌으나, 2009년 기준으로는 18곳만 남은 상태로 사라져 가고 있다.[2]
  • 미아리고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해 있는 고개로 문경새재처럼 이 고개를 넘으면 미아리에 들어서게 된다. 과거에는 한양의 외곽과 수도권에 인접한 마을인 미아리의 경계였으나, 현재는 성신여대입구역에서 길음역을 넘어가는 경계로 쓰이고 있다.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6.25 전쟁 때 마지막 서울 방어전이 펼쳐졌던 미아리 전투의 격전지였다. 고개를 넘으면 미아동이 아닌 길음동이 나오는 지명의 불일치는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되면서 생겼다. 본래 통째로 미아동이었으나 분구 과정에서 도봉구로 떨어져 나간 지역은 미아동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고, 성북구에 잔류한 지역은 길음동으로 바뀌었기 때문. 미아리 텍사스도 월곡동에 있다.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미아리고개가 바로 이곳을 말한다.[3]
  • 미아리고개는 성북구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또 일제강점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 이 고개를 되너미고개라 하였다. 병자호란 때 되놈(호인, 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되너미재 · 적유현 · 호유현이라고도 했으며 돈암동고개 · 돈암현이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는 여러 차례 깎여 낮아지고 폭도 넓어졌지만 옛날에는 몹시 험준했다. 1950년 6 · 25전쟁 때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이 고개에서 아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3개월 후 9 · 28 서울수복 때 쫓겨 가던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퇴각하면서 많은 애국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간 후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으며, 한과 슬픔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가 나와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미아리고개의 유래[편집]

  • 미아리고개라 불리게 된 이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미아동의 동명이 생겨났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되놈이 넘어온 고개라고 하여 되넘이고개(돈암현)로 불리기도 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오랑캐가 이곳으로 넘어왔다고 해서 적유령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여진족이 한성의 부녀자를 붙잡아 이곳을 통해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 미아리고개는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에 한국인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이 고개를 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므로 이때부터 미아리고개라고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는 되너미고개이나 이를 한자로 옮긴 적유령, 적유현, 호유현 등으로도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도성대지도』, 『경조오부도』 등에는 적유현으로 되어 있고, 『여지대전도』 「도성도」, 「사산금표도」 등에는 호유현으로 나타난다. 되너미고개란 병자호란 때 오랑캐, 즉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쳐들어온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의정부로 나가는 길목인 이 고개가 끝나면 고개가 없으므로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경사가 몹시 심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어 기운이 빠지므로 다시 요기를 해야 된다는 뜻 즉 밥을 되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되너미고개를 한자로 옮겨 돈암현(敦岩峴)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돈암동의 유래가 되었다.

6.25 전쟁과 미아리고개[편집]

  • 미아리 고개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큰 고개였고,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턱이 되는 고개였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 되었고 그곳에서 북한군과 한국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 북한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 애국지사들이 포로가 되어 줄줄이 이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갔다. 1950년 9월 15일 ~ 28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은 주요 인사들을 압송하여 돈암동 → 미아리고개 → 우이동 방면으로 퇴각한다. 이때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성북구의 독립운동가들이 포로로 잡혀 납북을 당한다. 1951년 4월 25일에 성북구는 1·4후퇴 이후, 4월 22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된 적의 공격이 도봉구 우이동까지 내려오자 4월 25일 성북구 등 서울 북부일대에 피난령이 하달된다. 이때의 피난은 4월 말에 적이 다시 북으로 퇴각하면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 한국 전쟁 당시의 아픔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1956년에 발표된 트로트 곡으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이며 노래는 이해연이 불렀다. 제목의 '단장'은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을 말한다. 아직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미아로(彌阿路)[편집]

  • 1966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가 최초로 시내 46개 도로의 가로명을 정할 때 붙였던 이름으로, 처음에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미아삼거리에 이르는 3.9㎞ 구간이었다. 1984년 11월 7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미아리고개에 이르는 길이 2.35㎞ 구간이 '동소문로'로 변경되었고, 이후 2010년 도로명정비 시 나머지 구간도 모두 '동소문로'로 변경되었다. 돈암동에서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서 도로명이 유래하였다. 당시 주요 통과 지역은 성북구 동선동·돈암동·정릉동·길음동·하월곡동, 강북구 미아동이었다. 동소문로·도봉로와 남북으로 이어졌고, 정릉천을 복개한 정릉길과 내부순환로가 지났으며, 삼양로·종암로·월계로·개운산길과 연결·교차하였다.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된 후에는 도로소통능력이 좋아졌으며, 미아로·월계로·종암로가 만나는 미아삼거리는 교통의 요지이자 성북구 최대의 번화가였다.
  • 미아리고개는 원래 되너미고개로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가 8·15광복과 함께 북한동포 및 해외동포 등이 들어와 주택난이 따르자 1957∼1958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와 고양시 벽제읍으로 공동묘지를 이전함에 따라 주택가로 바뀌었다. 고개를 넘어가는 도로 주변에 점술집이 많았다. 매원초등학교·성신여자중고등학교·성신여자대학교·영훈초중고등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성북등기소 등의 관공서, 길음시장·미아시장·숭인시장·방천시장 등의 재래시장이 있었다. 도로 주변 상가 및 주택지구 뒤쪽 개운산에는 약사암 등 사찰이 많았으며, 개운산근린공원이 있어 주민들의 휴식공간 역할을 하였다.

미아리 점성촌(彌阿里占星村)[편집]

  •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고개 근처에 있는 역술인들의 점성촌이다. 서울 돈암동 큰길에서 미아리고개로 넘어가는 길가에 있다. 한국전쟁 전 종로3가에 집단 거주하던 점술가들이 전쟁과 함께 남산 근처로 생활터를 옮겼고, 남산 주변 정비로 흩어졌다가 1960년대 말부터 다시 이곳에 정착하였다. 역술인 이도병 씨가 1966년부터 거주한 것이 시초이며, 호황기였던 1980년대에는 약 100여 곳의 점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점술가는 모두 시각장애인이며, 역학에 근거한 점을 본다는 특징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성북구가 이곳을 전통의 거리로 개발하려 하였으나 기독교계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미아동[편집]

  • 미아동(彌阿洞)은 서울특별시 강북구에 위치한 행정동 및 법정동이다. 미아동은 지하철 및 도봉로가 중심을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도봉로 좌우에 소규모 점포가 밀집되어 상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소로와 골목길이 격자형으로 잘 발달되어 있고,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이 완비된 주거 안정 지역이며, 동쪽으로 대단위 규모의 오동근린공원이 있어 지역주민이 언제든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쾌적한 생활여건을 갖추고 있다.
  • 미아동이란 이름은 조선 고종 초의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치 않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 敦岩峴)를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제7동에 있는 '불당곡'(佛堂谷)에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미아리고개(彌阿里─)〉, 《두산백과》
  2. 미아리고개〉, 《위키백과》
  3. 미아리고개〉,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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