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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8일 (금) 15:50 기준 최신판

육십령

육십령(六十嶺)은 전라북도 장수군과 경상남도 함양군 사이에 있는 높이 734m의 소백산맥 또는 백두대간의 고개이다. 남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에 민령이 있다.[1]

개요[편집]

  • 육십령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西上面)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長溪面)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한다. 높이 734m이다.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국도가 지난다. [2]
  • 육십령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과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을 잇는 고개이다. 26번 국도(육십령로) 상에 있다. 육십령의 높이는 해발 734m이다. 육십령의 높이는 같은 소백산맥에서 유명한 고개인 죽령의 높이(해발 696m)보다 높다. 육십령 고개 전역이 덕유산 국립공원 내 남덕유산 지구에 속해 있다. 관리는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이 주관하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가 참여한다. 덕유산 종주코스인 육구종주의 시점이기도 하다. 26번 국도(육십령로)가 지나가고 있다. 육십령로 상에 육십령휴게소가 위치해 있다. 통영대전고속도로는 서상 나들목부터 장수 분기점 구간 사이에 육십령터널이 만들어졌고 육십령의 이름을 땄지만, 사실 육십령터널은 육십령을 지나가지 않는다. 육십령터널은 육십령 3km 남쪽에 있는 구시봉(해발 1,014m)을 통과해 간다.[3]
  • 육십령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주요한 고개로 도계표시가 서 있다. 높이는 734m이다. 신라 때부터 요해지(要害地)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 이상의 무리를 지어서 고개를 넘어야 도둑떼를 피할 수 있다거나 재몬당까지 60여 굽이가 된다고 해서 붙여졌다 한다. 삼국시대에는 나제국경(羅濟國境)의 요새지로서 성터와 봉화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인근 덕유산 봉우리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어 등극할 때 제단을 설치하였다는 유적이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육십현(六十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육복치(六卜峙)로 기록되어 있다.[4]
  • 육십령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높은 고개이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원명덕 마을에서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육십령 마을로 통하는 길이다. 과거 한양에서 삼남 지방으로 향하던 삼남대로 상에서 가장 큰 고개이기도 했다. 장수에서 정상부로 가는 길이 함양에서 정상부로 가는 길보다 험준하고 가파르다.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에 자리한 육십령은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이어주는 주요한 교통로 구실을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호남지방으로 넘어오는 진격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넘던 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신작로가 개통되었고, 지금은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육십령 터널이 통과한다.

육십령 명칭의 유래설[편집]

  • 육십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전라도 장수 읍치에서 이 고개의 정상부까지 육십리이고, 경상도 안의(지금의 함양군 서상면) 읍치에서도 이 고개 정상부까지 육십리여서 육십령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이 고개를 넘어가려면 크고 작은 60개 굽이를 지나야 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육십령이라 했다고 한다.
  • 육십령의 명칭은 『장수군지』에 기록되어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개가 높고 험하기에 고갯길에 도둑들이 많이 있어 함부로 산을 넘지 못했으며,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성인 남성 60명 이상이 모여야 했다는 데에서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60명이 모이면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떼를 지어 넘었다고 한다. 과거에 고개를 넘으려던 장정들이 모였던 주막이 있던 곳을 장군동(壯群洞)이라 하고, 고개 주변에 있는 산적을 피해서 산 아래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육십령의 자연환경[편집]

  • 육십령은 소백산맥의 남덕유산(1,507m)과 그 남쪽의 백운산(1,279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고개의 동사면은 지천을 거쳐 낙동강지류남강(南江)의 최상류 계곡과 통하고, 서사면은 평지천을 거쳐 명덕천으로 연결되어 금강의 최상류 계곡과 이어진다. 이들 양 사면을 흐르는 하천은 많은 침식분지를 만들어 동쪽에 함양ㆍ안의ㆍ도천(道川) 등의 산간분지와, 서쪽에 장계(長溪)ㆍ명덕(明德) 등의 산간분지를 형성하였다.
  •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구간에는 육십령 외에도 지경령(地境嶺)ㆍ월암령(月巖嶺)ㆍ팔량치(八良峙)와 같은 많은 고개가 있어 예로부터 소백산맥의 장애를 극복하여 왔으나, 그중에서도 육십령은 신라 때부터 개통된 지 오래된 고개이다. 과거에 육십령은 조령(643m), 죽령(689m), 팔량치(513m) 등과 함께 소백산맥을 잇는 영남 지방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육십령은 거창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남도 북부지역과 진안을 거쳐 전주에 이르는 전라북도 동부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26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육십령터널이 만들어졌고, 익산∼포항을 잇는 고속도로도 일부 준공되어 인근 장계면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 육십령은 조령, 죽령, 팔량치와 더불어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4대 고개로 꼽힌다. 육십령은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으며, 신라와 백제의 성화터와 봉수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육십령이 왜군들의 진격로이기도 했다. 적장을 부둥켜안고 진주의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고향이 육십령 아래 장계면에 있다. 조선시대에 영남지방의 선비들은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떨어진다는 의미가 있는 추풍령을 통하지 않고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를 거쳐 한양으로 이동했다.

육십령 옛길 탐방로[편집]

  • 지금의 국도 26호선이 통과하는 육십령은 일제강점기에 자갈길로 개설된 신작로이지, 본래의 육십령 옛길이 아니다. 그렇지만 통영대전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구간의 깃대봉 아래에 육십령 터널이 개통되어 자동차의 통행량이 줄어들면서 국도 26호선이 통과하는 육십령 길도 이제는 옛길이 되어 버렸다. 육십령을 넘는 방식이 과거의 산골짜기를 따라 걷던 옛길에서 자동차를 타고 고개를 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고개 아래 터널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 과거에 전라도에서 육십령으로 걸어서 넘던 옛길은 장수의 원명덕 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땅이 멍덕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명덕(明德)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명덕마을에서 이어지는 옛길은 장수 경주마목장에 의해 단절돼 있지만, 이 일대에는 과거 주막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옛길을 따라 오르면 육십령 휴게소의 서쪽 끝에는 장계면 일대가 잘 내려다보이는 육십령루(六十嶺樓)가 자리하고 있어, 멀리 팔공산·덕태산·운장산 등이 잘 보인다. 목장에서부터 고갯마루에 이르는 구간은 아직까지도 옛길이 남아 있다.
  • 전라북도 장수군에서는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육십령 옛길을 '영·호남 화합의 숲'으로 조성하여 백두대간의 기능을 회복하는 동시에 산악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동서화합의 장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국도 26호선이 통과하는 고개 정상부에는 '백두대간 육십령터널'이 있는데, 이는 땅을 파서 만든 터널이 아니라 백두대간의 생태계 보호를 위한 생태통로를 도로 위에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터널이다.

육십령의 역사[편집]

  • 육십령 일대는 원래 가야 제국(諸國)의 일원인 졸마국의 땅이었다. 졸마국은 백제와 친해 육십령을 통해 백제와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 대인 560년대 후반에 신라의 공격으로 졸마국이 멸망하면서 육십령은 졸지에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육십령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천혜의 요새가 됐고, 자연히 육십령 고개 내부의 치안은 급속도로 악화했다. 백제와 신라의 도적이 상대국으로 가는 행상인을 공격하는 일이 다수 발생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번 나빠진 육십령의 치안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도적떼가 들끓는 고개가 되고 말았다.
  • 육십령 일대의 치안이 괜찮아진 것은 고려 시대 들어서였다. 그러나 여몽전쟁 때 고려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지면서 이 일대에서 또다시 도적질이 기승을 부리는 등 치안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육십령은 평화 시에는 치안이 괜찮다가 임진왜란 등 변란이 일어나면 도적질이 기승을 부리는 등 치안 상황이 하늘과 땅을 오갔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 일대의 국민들이 피난을 가거나 전쟁에 휘말려 죽는 등 거주민이 없어지면서 현대 대한민국에 와서야 육십령은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26번 국도의 통과 및 통영대전고속도로의 개통 등으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육십령 고성[편집]

  •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육십령에 있는 삼국시대 고성이다. 삼국시대 조성된 육십령 고성(古城)은 신라가 백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의 조령에서 남쪽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까지 남북으로 뻗은 산맥의 주 능선에 축조한 것이다. 봉우리의 망루와 같은 부속시설 주변의 석축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석축이나 토축의 시설 없이 자연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 육십령고성은 육십령을 기점으로 함양군 서상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를 짓는 주 능선에 있다. 능선은 서상면 소재지에서 국도26호선을 따라 북상하다가 중남삼거리에서 서쪽 전라북도 장수군 쪽으로 향하면 나오며, 북쪽 할미봉 능선을 오르면 고성이 나온다. 육십령 고성은 남쪽의 육십령에서 할미봉(합미봉)까지의 능선이다. 능선 정상부는 편평하고 양쪽에 있는 가파른 경사가 자연적인 성벽의 조건이 갖추고 있어 별도의 석축이나 토축 시설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상부 일부는 양사면을 깎아 성벽의 경사를 더 급하게 하여 성벽의 효과를 더했으며, 정상부 둘레를 따라 석축을 한 흔적이 있다. 특히 할미봉에서 남쪽 700m쯤의 봉우리 정상부에 있는 석축 흔적은 망루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조령에서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까지 주 능선의 곳곳에서 망루의 기능을 했던 석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육십령〉, 《위키백과》
  2. 육십령(六十嶺)〉, 《두산백과》
  3. 육십령〉, 《나무위키》
  4. 육십령(六十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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