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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낙산(駱山)은 서울 종로구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높이는 약 125m이다.

개요[편집]

  • 낙산은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동서(東西)로 마주 보며 대치하는 산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 낙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만들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다. 신대약수에는 강세황의 글씨인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암각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조선 시대 한양성곽이 낙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1]
  • 낙산은 서울의 내사산의 하나로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지형이 낙타의 등처럼 생겨 낙타산이라고도 했으며, 일대에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 목장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불렸다. 60년대 이후 시민아파트와 밀집된 주택으로 낙산의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고, 서울시는 낙산복원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 계획의 일환으로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어 2002년 7월 낙산공원으로 개원하였다. 현재 낙산공원은 서울한양도성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 낙산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중 하나이다.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002년 6월 12일에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산의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으나 서울시의 녹지 확충 계획에 의해 낙산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라 하여 한양에 수도가 입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내사산(內四山)을 이루며,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고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과 마주 본다. 한양도성이 능선에 축성되었다. 조선 시대 도성 5대 명승지에 이름을 올린 낙산은 조선시대 때 문인들이 별장을 짓고 살 만큼 풍광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삼청(三淸)·인왕(仁王)·쌍계(雙鷄)·백운(白雲)·청학(淸鶴)을 도성 안의 5대 명승지로 손꼽았는데, 이 중 현재의 이화동에 있던 쌍계동이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림에 두줄기의 맑은 시냇물까지 있다 하여 세 번째로 꼽혔다.[2]
  • 낙산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 동대문구 ·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하여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에 대치되는 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깨끗한 수석과 약수터가 있어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를 위시하여 유적이 많았다. 효종 때 왕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 영조시대의 문인 이심원(李心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은 왕족·문인·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또한, 산록에 있던 쌍계동(雙溪洞)은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으로 삼청·인왕·백운·청학과 더불어 도성 내 5대 명승지로 꼽혔다. 현재는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옛 자취를 찾기 어렵고 다만 산정에 남아 있는 성벽만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서울시는 2002년 이 일대에 "낙산공원"을 조성하였다. [3]

낙산의 역사[편집]

  • 낙산은 오래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야트막한 산으로 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문인들이 낙산 인근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과 이별하고 이곳 낙산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순왕후는 폐서인되어 낙산 아래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고 창신동 골짜기에서 비단에 자색 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팔며 살았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샘물이 있던 곳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암각자가 남아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68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府)의 총무당이 있었는데, 1880년에는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 일제는 1920년부터 펼쳐진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동숭동에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설립했고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립했다. 해방된 뒤에 이곳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의대로 바뀌었다. 낙산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반대편의 나지막한 언덕으로 보이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아래 위치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萬)의 집인 이화장(梨花莊)이 지금도 남아있다. 사찰로는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청룡사(靑龍寺)가 있고,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미타사는 여승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있다. 근래에는 한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성곽이 복원되었으며 낙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주변 관광지[편집]

  • 낙산은 한양도성의 좌청룡 · 우백호 · 남주작 · 북현무의 좌청룡에 해당.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이화동, 동숭동, 창신동, 숭인동, 성북구 삼선동, 보문동 일대에 걸쳐있는 산이다. 종로5가역, 동대문역, 동묘앞역, 창신역에서 서울 버스 종로03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 정상이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서울 버스 성북02를 타고 종점인 한성대에서 내려서 5~10분 걸으면 낙산 정상이다. 물론 상술한 역에서 걸어가도 무방하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1시간만 올라가면 정상이다. 과거엔 낙타의 등과 비슷하다 하여 낙타산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먹을 우유를 공급하는 소들을 이곳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타락산'이라는 이명도 존재한다.
  • 서울한양도성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내사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여 쌓은 약 18.2km의 성곽이다. 한양도성길 낙산구간은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2.1km 구간이다. 성곽 바로 옆으로 난 길을 걷다 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으며, 가톨릭대학 뒤편에는 축조 시기별로 성돌의 모양을 관찰할 수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싸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 도성 중 가장 크고 잘 보존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 구간 중 가장 걷기 좋은 낙산성곽길을 따라 600년이 넘는 역사와 탁월한 가치를 보고 느낄 수 있다. 동대문성곽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이어지는 성벽은 조선시대의 성 쌓는 기술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나라를 지키려는 조상들의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다.
  • 낙산전시관은 낙산공원 입구에 있는 시설물로 낙산의 유래, 역사적 인물, 한양도성 의 사진 자료 및 모형이 전시되어 낙산공원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주말에는 낙산과 서울한양도성에 관한 공원 이용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누구나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 홍덕이밭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효종(당시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 혀 있을 때 홍덕이라는 여인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당시 나인 홍덕이는 머나먼 타지에서 김치를 담가서 효종에게 날마다 드렸고, 후에 고국으로 돌아온 효종이 홍덕 이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낙산 중턱에 채소밭을 홍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바 치게 했다 하여 홍덕이밭이라 한다.

낙산공원[편집]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東崇洞) 낙산에 있는 근린공원이다. 수도 서울을 구성하는 내사산(內四山:북악산·남산·인왕산·낙산)의 하나이자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의 자연환경과 역사적 문화환경을 복원함으로써 서울시민들에게 쾌적한 공원 경관을 제공하고, 자연 탐방을 통해 역사와 문화 교육의 장을 제공할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 2-10번지 일원에 있으며, 서울시 공원녹지관리사업소가 관리한다. 총면적은 6만 1145평으로, 1999년 12월 30일 착공해 2002년 7월 완공하였다. 공원 녹지화를 위해 소나무를 포함해 총 40종 8만 967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주변 유적으로는 서울 동대문(東大門), 서울성곽, 이화장(梨花莊) 등이 있다. 그 밖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만 둘러싸여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홍수동(紅樹洞:홍숫골), 단종이 영월(寧越) 청령포(淸泠浦)에서 귀양살이할 때 왕비가 저고리깃·댕기 등에 자줏빛 물을 들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자지동천(紫芝洞泉),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李晬光)이 외조부의 집을 손질하며 "겨우 비만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당호를 붙인 비우당,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어 이름 붙여진 오형제 우물터, 오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부학당 터 등이 있다.
  • 낙산공원은 대학로와 동대문으로부터 이어지며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낙산은 지형이 낙타의 등처럼 생겨 낙타산이라고도 했고, 궁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 목장이 있어 타락산이라고도 불렀다. 1960년대 이후 시민아파트와 밀집된 주택으로 낙산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고, 서울시가 낙산 복원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어 2002년 7월 낙산공원으로 개원하였다. 낙산공원 중앙광장에는 낙산전시관과 중앙무대, 매점 등이 있어서 쉬어가기 좋고 광장 바로 아래 주차장이 있어서 중앙광장으로 오기도 편하다. 낙산전시관은 낙산공원 입구에 있는 시설물로 낙산의 유래, 역사적 인물, 한양도성의 사진 자료 및 모형이 전시되어 낙산공원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주말에는 낙산과 서울한양도성에 관한 공원 이용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광장 한쪽으로는 낙산정이 있다. 낙산정은 낙산을 복원하면서 만든 정자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서울한양도성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다. 언덕 정상에서 주택과 벽화가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로 갈 수 있고 흥인지문과 한양도성길로 가는 동대문 코스, 외부 성곽 벽면 전체를 보면서 걸을 수 있는 한성대 입구 방면 코스 등 다양한 코스가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낙산(駱山)〉, 《두산백과》
  2. 낙산〉, 《위키백과》
  3. 낙산(駱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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