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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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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협

노량해협(露梁海峽)은 경상남도 남해군 노량리(설천면)와 하동군 노량리(금남면) 사이를 흐르는 남해 바다이다.

개요

  • 노량해협의 폭이 가장 좁은 곳에는 이곳을 지나는 1973년에 개통된 높이 80m, 길이 660m의 남해대교가 있다.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빠르다. 노량해전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는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 유적지로 사적 제232호로 지정된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적지가 있다. 이곳은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처음에 가매장했던 곳이다. 칠천량, 견내량, 노량 등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의 배경이 된 '량(梁)'이 붙은 지명은 육지와 가까워서 바다의 폭이 좁아지는 해협을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은 한 번이라도 패하면, 수로의 주도권을 놓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므로, 해협을 낀 수륙 합동 작전을 위한 유인작전과 공방전을 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의 배경이 된 곳은 이러한 좁은 해협과 거센 물길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육지와의 사이에서 바다의 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교량이 서 있다.[1]

노량해전

  •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따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450여 척의 전선을 격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조명 연합군은 이순신과 진린이 이끌었고, 일본군은 순천왜성에서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와 진린의 어처구니없는 뇌물매수로 인해 발생하게 된 사천의 일본 구원병과 함께 서로 전투에 임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전투 초기 진린은 여전히 멀찍이서 관망만 하다 조선 수군의 분투를 보고 마침내 참전하였으나 오히려 일본군에 포위되어 이순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정도로 조명 연합군의 공조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남해군

  • 남해군의 읍소재지는 북변리, 군청도 북변리에 있다. 관할 법정리는 10개이다. 1979년 5월 1일에 읍으로 승격했다. 군청, 경찰서, 소방서, 교육지원청,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남해군법원, 남해시외버스터미널, 남해전통시장이 있는 남해군의 중심지. 경남도립남해대학, 남해향교도 읍내에 있다. 읍내 남쪽 남변삼거리에 남해유배문학관도 있다. 남해군 내에서는 그냥 '읍'이라고 불린다. 이동면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서면, 남면, 고현면, 설천면에서는 놀러 남해읍으로 간다. 읍내는 아산리, 북변리, 남변리, 서변리, 평리에 걸쳐 있다. 북변리에는 시외버스터미널과 보건소, 영화관이 있고 남변리에는 남해유배문학관, 경남도립남해대학이 있으며, 평리와 아산리는 아파트들이 몇 있는 주거지역이다. 학교는 남해초, 해양초, 남해중, 남해여중, 남해제일고가 있다.
  • 설천면의 면소재지는 남양리, 관할 법정리는 8개이다. 남해군의 북단에 위치해 있는 동시에 노량해협의 남단에 있으며, 남해의 관문으로써 노량해협에 남해대교, 노량대교가 놓여 있다. 남해대교 남단에는 작은 규모의 위락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남해충렬사가 있다. 예전에는 남해군에서 가장 교통이 발달해 있는 동네였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이 분화구 형태의 분지이다. 학교는 설천초, 설천중이 있다. 노량해협 건너편에도 이름이 같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가 있다.
  • 노량리(露梁里)는 비교적 평준한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농촌마을이다. 마을 남동쪽으로 금음산이 위치하며, 북서쪽으로 남해와 인접하여 있다. 자연마을로 노량마을, 감암마을이 있다. 노량마을은 바다가 목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감암 마을은 개구리 섬에 붙어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문화재로 사적 제233호인 남해충렬사가 있다.

노량대교

  • 노량대교(露梁大橋)는 대한민국 경상남도에 있는 다리로, 남해군 설천면과 하동군 금남면을 연결한다. 국도 제19호선을 구성하는 일반 국도 교량이다. 원래는 제2남해대교였으나, 2017년 말에 정식 명칭 결정을 열었지만 명칭 관련 분쟁으로 인해 2018년 2월 11일 최종적으로 노량대교로 확정되었다.
  • 노량대교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감암교차로에서 출발하여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노량교차로에서 끝나는 교량. 19번 국도의 일부이다. 왕복 4차로의 도로이며 최대경간장은 890m로 대한민국에서는 3위이다. 남해대교를 대체할 교량이고 19번 국도 확장 사업에 포함되어 2018년 9월 13일에 개통했다.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이 일어났던 장소로, 다리의 디자인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 '학익진'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교량의 개통으로 수도권과 남해를 기존 경로보다 더 빠르게 오갈 수 있으며 세계 최초로 경사 주탑과 3차원 케이블 등 첨단 기술이 적용되었다. 주탑 높이도 148.6m로 대한민국의 현수교 중 세 번째로 높다. 세계에서 최초로 8도 기울어진 주탑이기도 한데 이는 주탑이 더 많은 힘을 부담하게 하여 앵커리지의 크기를 11% 줄이고 앵커리지까지의 거리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명칭은 노량대교 vs 제2남해대교로 하동군과 남해군이 갈등을 겪었는데 결국 노량대교로 결정되었다.

노량해협 유역의 관광

  • 노량해협을 사이좋게 끼고 있는 하동과 남해에 똑같은 노량리가 마주보고 있다. 노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노량해전이요, 이순신 장군이다. 13척의 전선으로 왜적의 450여 척을 격파했다. 이순신호국로는 하동 금남면사무소에서 남해대교를 거쳐 남해 관음포까지 이어지는 짧지만 강렬한 길이다. 깔끔하게 새로 난 길을 달리면 이순신호국로 출발점인 하동군 금남면사무소 앞에 도착한다. 노량대교 동쪽으로는 광양만이 보이고, 서쪽으로 한국 최초의 현수교로 아름다움과 위용을 자랑하던 다홍색의 남해대교가 보인다. 한국판 금문교로도 불려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던 보물섬 남해군의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게 한 일등공신이 이 대교이다. 대교 아래의 바닷물은 왜적을 물리친 장군과 조선 수군을 닮은 듯한 짙푸른 바다가 아찔하게 다가온다.
  • 남해대교를 건너면 오래된 왕벗나무들이 반기는데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며, 남해안의 낙조가 아름다운 곳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선정한 곳이다. 노량대교와 남해대교 아래에는 횟집촌 앞 바다에 거북선 한 척이 떠 있다. 수군깃발에 날리는 부교를 통해 실물크기의 거북선으로 들어서면 배를 지휘하는 장수의 밀랍인형이 앉아있고, 수군 인형들은 경비를 서고 있다. 16개의 노에 최대 6노트를 낼 수 있는 돌격용 전선인 거북선에는 14개의 포문이 설치되어 있다. 스피커를 통해 그날의 혈투를 재현하는 듯 '포를 발사하라'라는 장수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맞은편 언덕 위에는 충렬사가 있다. '노량바다는 이 충무공이 전사하신 데라, 여기에 충렬사를 세우니라'라는 비석이 충렬사임을 알리고 있다.
  • 노량공원을 거쳐 옛날 도로를 따라 이순신순국공원과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지가 있다. 유허지는 이락사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처음 육지에 오른 곳이다. 입구엔 '戰方急 愼勿言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비석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양옆으로 장성들이 도열한 듯 소나무들이 들어선 부드러운 오솔길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동백나무들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심신을 정화하고 500m쯤 가면 첨망대가 보인다. 첨망대, 이순신 장군이 순국하신 옛 자리를 보면서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91년에 건립한 누각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관음포해전의 전장이 한눈에 보인다. 전투가 끝난 뒤 장군의 시신을 뭍으로 옮긴 곳이 바로 이락사 옆 관음포 해변이라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의 작은 포구를 이락포, 산을 이락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노량해협 유적지

  • 노량해전이 벌어진 관음포 앞바다가 있다. 남해 하면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역사의 풍랑이 거셌던 데이기도 하다. 430년 전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임진왜란의 마지막 끝자락 회오리가 남해를 몰아쳤다. 하동에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건너면 노량마을이 나타난다. 노량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치러진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둔 곳이다. 남해군은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경상남도의 지원 아래 찾아오는 탐방객과 관광객을 늘리고자 지역을 갈고닦으면서 널리 알리는 활동을 펼쳐 왔다.
  • 장군의 시신이 뭍에 오른 이락포. 장군의 시신이 처음 뭍에 오른 자리가 바로 관음포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34년 만인 1832년에 제단을 만들고 유허비를 세웠다. 한글로 새겨진 '리충무공전적비'도 있는데 6.25전쟁이 한창일 때 남해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이락포라고도 하는데 이순신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쓴다. 여기서 솔숲을 500m 정도 오르면 첨망대가 나온다. 해 질 무렵 첨망대에 오르면 앞바다가 노을을 받아 온통 붉은빛이다. 430년 전 그날 피로 물든 바로 그 바다다. 옆에는 이순신순국공원이 있는데 호국광장과 관음포광장으로 나누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시설을 갖추었다. 이순신영상관에서는 노량해전을 3D 영상으로 보여준다.
  • 장군의 가묘를 썼던 충렬사. 장군의 시신은 노량나루 근처 지금 충렬사 자리에 잠깐 머물렀다. 지금도 사당 뒤편에 가묘가 남아 있는데 그러다 수군 본영이 있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진 다음 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 묻혔다. 충렬사는 1632년 처음 지어질 때는 조그만 띠집이었다. 조정에서 베푸는 공식 이전 이전에 남해 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초가 한 칸을 짓고 처음 제사를 올렸다. 조정은 1643년에 '충무공' 시호를 내렸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를 얹은 것은 다시 15년이 지난 1658년이었다. 60년이 지나서야 조정이 보살피기 시작한 셈이다. '충렬사' 현판은 그보다 늦은 1663년에 내려왔다. 충렬사 들머리에도 한글 비석이 서 있다.
  • 고려 시대 관음포대첩과 정지석탑. 남해 고현면 탑동마을에 가면 관음포대첩을 기리는 '정지석탑'이 세워져 있다. 마을 한가운데 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데 당시 백성들이 손수 깎고 다듬은 돌을 4층으로 쌓아 만들었다.

동영상

각주

  1. 노량해협〉,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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