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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7일 (화) 17:43 판

홍단수

홍단수(紅端水)는 길이는 76.5km로, 전반적으로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흐르며, 대홍단군 내의 기본 수계를 이룬다.

개요

  • 홍단수는 소홍단수(小紅端水)라고도 하며 두만강지류 중 하나로, 양강도 삼지연시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 m)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대홍단군 대홍단읍에서 두만강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홍단수는 대홍단군 내 관개용수와 주민 생활용수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제2차 감계회담(1887년) 당시 청나라는 북포태산(北胞胎山)에서 발원하는 두만강의 지류인 홍단수(紅端水)를 국경으로 주장했다가 조선 대표인 이중하의 논리에 밀리자 홍토수의 남쪽 지류인 석을수(石乙水)를 경계로 삼자고 수정 제의하였다.[1] 홍단수는 도문강의 근원이 되는 물줄기로, 봉천 장백현의 북쪽 분수령 동쪽의 삼급포에서 발원한다. 삼급포는 동북 8 리에 있는 천통에서 출수되며 이곳이 삼급포의 수원이다. 또 삼급포(홍단수)는 동북쪽으로 17 리를 흘러 우측 기슭으로 작은 물줄기 4개를 흡수한 뒤 계속 동북쪽으로 꺾여 47 리를 흐르는 곳에서 유동하가 우안(右岸)으로 들어온다. 또 동북쪽으로 64 리를 흘러 도문강 북쪽에서 발원하는 석을수와 만난다.
  • 홍단수함경북도 무산군 북서 쪽의 여러 산에서 발원하여 북부를 지나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백두산 부근의 소연지봉(小臙脂峯)과 소백산(小白山)·북포태산(北胞胎山) 등에서 발원하며 높이 800∼1,000m의 대지성 고원지대를 흐른다. 지질은 편마암지대에 속하며 토양은 흑갈색 식양토로 비교적 비옥하다. 이 유역은 한반도 최대 삼림자원의 보고이다. 유량은 풍부한 편으로, 한때 유역 일대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운반하는 데 이용되었다. 주요삼림은 침엽수림으로 전나무·가문비나무·분비나무·잣나무·낙엽송 등이다. 이 밖에 약초와 산채·산삼 등이 풍부하다. 산간 취락으로 하천 중류에 신개척(新開拓)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주로 조방적(粗放的 : 거칠고 맺힌 데가 없는 모양) 화전농업을 하며 감자·옥수수·메밀·귀리 등의 밭작물을 재배한다.[2]
  • 홍단수는 도문강의 근원으로 분수령 동쪽의 삼급포(三汲泡)에서 출수한다. 동북으로 60 리를 흘러 유동하를 받아들이고, 계속 동북쪽으로 64리를 흘러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석을수와 합류한다. 석을수의 발원지는 분수령의 동북쪽 38리에 있으며 동북으로 계속 흘러 21리에 이르러 홍토산수와 합류한다. 다시 동쪽으로 95리를 흘러 홍단수와 합류한다. 도문강은 만주어로 도문색금이라고 하는데 도문은 만(萬)이라 하고, 색금은 물의 근원을 말한다. 옛 이름은 통문, 타만, 또는 토문, 두만이라 하는데 번역할 때의 발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도문강에는 여러 이름이 있고 강의 발원지는 두 곳으로 모두 봉천 장백현의 동북쪽에 있는 장백산맥에서 돌출된 곳의 분수령에서 발원한다.

농사노동자구

  • 농사노동자구(農事勞動者區)는 양강도(량강도) 대홍단군 북동부의 두만강과 소홍단수 사이에 있는 노동자구이다. 해발고도 1,000m의 고지대에 있으며 백두삼천리평야에 속한다. 산업 중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고지대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감자 등이다. 특히 이곳은 대홍단군에서 양돈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다. 주요 기관으로는 고등중학교·인민학교와 병원 등 교육·문화·보건 기관들이 있으며 식당·상점 등 편의시설도 들어서 있다. 혜산~무산 간 도로가 지나며 군소재지인 대홍단읍까지는 약 3㎞이다.

대흥단군

  • 대흥단군은 양강도 동북단에 위치한 군이다. 동쪽은 함경북도 연사군 무산군, 서쪽은 삼지연시, 남쪽은 백암군과 접하고, 북쪽은 두만강 경계로 중국과 접한다. 북한 양강도의 군 중 하나이다. 광복 당시에는 함경북도 무산군의 삼장면, 삼사면에 속해 있었다. 현재 대홍단군 지역은 삼장면의 절반, 삼사면의 북쪽 1/5 지역에 해당한다. 대홍단이라는 이름은 지역 이름 중 하나인 대홍단벌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지역을 흐르는 하천 이름은 소홍단수이다.
  • 대흥단군 면적의 거의 전부가 산지이다. 단군이 강림한 곳으로 알려진 천리천평이 있다. 도로는 10번 국도가 소홍단수를 따라 동서로 지나가며, 철도는 없다. 과거 보천선 보천역에서 분기하여 삼지연읍과 대홍단읍을 경유해 흥암역에서 백무선에 접속하는 철도를 계획한 바가 있으나 무산되었다. 여기저기에 감자밭이 워낙 넓게 퍼져 있으니 이걸 읍까지 실어나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이 철도라는 게 고작 762mm 협궤인지라 감자 수송에서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대흥단군의 최동단인 삼장리에 삼장세관이 있으며, 강 건너편 중국과는 다리로 연결된다.

조중변계조약

  • 조중 변계 조약(朝中邊界條約)은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국이 평양에서 체결한 국경 조약으로,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양국이 의정서(조중 변계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백두산 · 압록강 ·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양국의 국경선을 명확히 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과 중화인민공화국 저우언라이가 양국을 대표하여 서명하였다. 조중 변계 조약은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황해 영해(領海)의 국경선에 관한 내용을 적고 있다.
  • 조선과 청나라는 1880년대에 두 차례 걸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회담은 모두 결렬되었다. 제1차 감계회담(1885년)에서는 백두산정계비에 쓰인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토문(土門)"이 두만강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양측이 다투었다. 당시 조선 측은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청측은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이 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제2차 감계회담(1887년)에서 조선 측은 백두산 산정(山頂)에서 가장 가까운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를 국경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청 측은 북포태산(北胞胎山)에서 발원하는 두만강의 지류인 홍단수(紅端水)를 국경으로 주장했다가 조선측 대표인 이중하의 논리에 밀리자 홍토수의 남쪽 지류인 석을수(石乙水)를 경계로 삼자고 수정 제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일제가 체결한 조약인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되었다. 이에 새로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 조중 변계 조약이다.

간도문제

  • 간도 문제(間島問題)는 만주에 있는 간도 지방과 오늘날의 삼지연시 거의 대부분과 대홍단군의 일부 지역의 영토귀속권(領土歸屬權)을 가지고 조선과 청 제국 사이에 서로 분쟁한 사건이다. 간도는 원래 읍루(挹婁)·옥저(沃沮)의 옛 터이며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故地)로서 발해 멸망 이후에 여진족이 거주하면서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으므로 고려의 윤관(尹瓘), 조선의 김종서(金宗瑞) 등이 이를 정벌한 바 있다. 그러나 청 제국이 건국한 후 북방의 경계선이 분명치 못하여 오랫동안 한광지대(閑曠地帶)로 존속해 오던 중 점차 조선의 유민(流民)이 입주하여 미개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자 청 제국은 간도를 금봉지(禁封地)로 설정하고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였으나 산둥 지방의 유민이 잠입(潛入), 조선 유민과 대립하여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 청 제국은 정계비에 적혀 있는 '토문(土門)'을 두만강의 동어이자(同語異字)라 주장하였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을 국경으로 주장해 홍단수를 지나는 선을 국경이라고 주장했다. 조선 측에서는 실제적인 증거를 들어 간도는 마땅히 흑석구 이남, 즉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홍단수 국경설에 대해서는 홍단수 이북에 위치해 오랫동안 조선이 실효지배하고 조선인이 거주해온 장파 지역을 근거로 반박하였다. 회담은 3차에 걸쳐 개최되었으며 을유감계와 정해감계 사이에 청측이 '차지안민'안을 제안해 두만강 이북을 청국 영토로 하는 대신 조선의 행정력이 지배하게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홍토수를 국경으로 하고 홍토수 이북 간도 지역의 재판권은 조선 지방관이 맡는다는 전제로 차지안민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지만 청나라가 결국 차지안민안을 거부했다. 1962년에 조중 변계 조약이 체결되어 북중 간에는 분쟁이 일단락되었으나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은 처음에는 홍단수 국경을 계속 주장했으나, 이후 간도 협약에 따른 경계를 주장하는 건으로 견해를 변경하였다.

두만강

  • 홍단수는 두만강의 지류 중 하나이다. 두만강은 길이 547.8㎞, 유역면적 32,920㎢이며, 한국·중국·러시아의 국경을 흐른다. 상류에서 유선까지는 북동 방향, 유선에서 온성까지는 남북방향, 온성에서 어구까지는 남동 방향으로 흐른다. 주요 지류는 상류인 백두산∼무산 사이에서 흘러드는 소홍단수(76.5㎞)·서두수(173.1㎞)·연면수(80㎞)·성천수(76.3㎞), 중국의 흉기하, 중류인 무산∼온성 사이에서 흘러드는 회령천(46㎞)·보율천(31.8㎞)·용천천(27㎞)·팔을천(26㎞), 하류인 온성∼우암 사이에서 흘러드는 오령천(27㎞)·중국의 훈춘하·가야하 등이 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량강도, 함경북도와 라선시의 북쪽 경계를 흐르는 강이다. 북한-중국 국경, 러시아-북한 국경을 이루고 있다.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홍토수(紅土水)를 원류로, 석을수(石乙水), 홍단수(紅端水), 서두수(西頭水), 홍기하(紅旗河),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등의 지류와 합쳐지며 북한과 러시아의 경계지역을 거쳐 동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길이는 521km로 대한민국(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보다 길다. 유역면적은 33,800㎢. 길이와 유역면적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 만주지명고에 의하면, 두만강이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뜻의 도문색금(圖們色禽)에서 색금을 뗀 도문이라는 여진어(女眞語) 자구(字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뒤에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쓰여 있는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자구 속의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청나라 측이 강변함으로써 오늘날의 간도 지역을 중국의 영역으로 하고 있다. 두만강은 중국 ·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역사상 매우 중요한 강이었다. 고려시대까지는 여진족이 주로 살던 곳이어서 그들의 영향이 문화와 취락 경관에서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들을 몰아내고 개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병영취락(兵營聚落)이나 개척취락들이 형성되었다. 함경도 지방에 기근이 들 때마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이 강을 넘어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이들로 인하여 청나라와 국경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일제의 학정을 피하여 수많은 우리 민족들이 이 강을 건넜다. 이러한 민족의 역사를 안고 있는 두만강 유역은 비록 자연적 조건은 매우 불리하지만 거의 무진장으로 펼쳐진 미개척의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이 있어 무한한 개발 가능의 잠재력을 가진 땅이다.

홍단수 지역 환경

  • 홍단수 유역은 화강편마암 위에 상부고생층과 제3계(第三系)가 순차적으로 퇴적되어 있으며, 하구 연안은 화강암지대이다. 낮은 산과 충적평야 및 모래언덕으로 되어 있다. 경사는 매우 완만하며 퇴적작용에 의해 생긴 온성섬·유다섬(류다섬)·사회섬·큰섬 등의 이 많으며 강 어귀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하류 연안에는 모래언덕과 충적평야, 흑지·만포·서번포·동번포 등의 호수가 있다. 유역의 기후는 동계 혹한 기후로, 강우량도 적어 500~700mm이다. 유역에는 넓은 초지가 발달하여 소 · 면양 등의 방목이 성하다. 특히, 대규모의 목장으로는 삼지연목장(三池淵牧場)이 유명하다. 잎갈무·소나무·참나무·오리나무·사시나무 등의 혼합림으로 되어있다. 서두수·연면수·성천수 등의 지류에 저수지가 건설되어 수량의 변화와 홍수가 적다. 어종으로는 두만강 고유종인 두만강야레를 비롯하여 산천어·연어·송어·황어·잉어·붕어 등이 많다. 반건조성 토양인 흑토가 국부적으로 분포한다.

동영상

각주

  1. 홍단수〉, 《위키백과》
  2. 소홍단수(小紅端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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