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백마강(白馬江)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근을 흐르는 금강(錦江)의 하류 구간을 가리킨다.
목차
개요
- 백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거처 강경에서부터 충청남도·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금강(錦江)의 하류 구간을 일컫는 명칭이다. 그 중 백마강의 범위는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虎岩里)의 천정대에서 시작되어 낙화암과 조룡대, 구드래나루터, 부산과 대재각, 수북정과 자온대, 맞바위, 세도면 반조원리(頒詔院里)에 이르는 약 16㎞의 구간을 말한다. 《삼국사기》에는 백강(白江),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도읍이 들어선 이후로 금강의 역할이 더욱 커졌는데, 특히 백마강은 일본, 신라, 당나라, 서역에 이르도록 문물교역의 큰 길목이 되었던 곳이다. 유람선을 이용하면 낙화암과 구드래 나루터, 수북정까지 관람할 수 있다. [1]
- 백마강은 백강(白江)이라고도 하며 충청남도 부여군을 지나는 금강(錦江)의 하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금산군(錦山郡) 이남의 금강 중하류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부소산 동측을 침식하여 백제 말기의 슬픈 이야기를 남긴 낙화암이란 하식애(河蝕崖)를 발달시켜 경승지를 이루고 있다. 부소산 정상에는 반월성지와 최고점인 월영대에 군창지가 있는데, 탄화된 쌀, 보리, 콩 등이 흙 속에 있어 좋은 관광 기념품이 되고 있다. 낙화암은 고도 평양의 모란봉 동쪽의 대동강 하식애인 청류벽을 방불케 하는 천연의 요험이다. 전에는 남서쪽으로의 왕래는 규암 나루를 통하였으나, 지금은 백제교를 이용하게 되어 편리해졌다. 강에는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가 위치해 있다.[2]
- 백마강은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의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토사의 퇴적이 심하여 매년 하상(河床)이 높아지고 있으며 범람이 자주 일어나 홍수 상습지역이다. 백마강 유역의 넓고 저평한 평야를 유효하게 이용하려면 인공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경지화를 도모하는 한편, 부여 사적지와 더불어 백마강의 자연을 결합하여 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3]
백마강의 명칭 유래
- 백마강(白馬江)의 '백(白)'자는 나라 이름, '마(馬)'는 '크다'는 뜻으로 '백제의 큰 강'이란 뜻을 담고 있다. 백마강은 부여를 흐르는 금강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이 같은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660년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백제로 진격해 왔다. 이때 당나라군의 진격로는 금강 일대였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윽고 당나라군의 지휘관이었던 소정방 앞에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이 노인은 '백제왕이 용으로 변해 조화를 부리는데, 평소 백마고기를 즐겨 먹는다더라.'라는 말을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죽인 다음 사비성으로 진격해 결국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다.
- 삼국사기 등 백제 멸망 이전에 쓰인 기록에 이미 '백강(白江)'이라는 이름이 표기된 것을 고려하면, 후에 붙여진 설화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거나 망국의 아픔이 서린 곳임은 틀림없다. 백제 패망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처로운 설화 때문일까. 백마강에는 유독 고즈넉한 운치가 가득하다. 지금은 사연 많은 백제의 유적과 인근의 절경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 하나, 백제 말기보다 1백 60여 년 앞선 무녕왕 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규암나루은 백마강의 주요 나루터였으나 백제대교의 건설로 나루터취락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다만 농업지역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강
- 강(江)은 내륙을 흐르는 하천(河川) 중에 규모가 제법 크고 뚜렷한 물줄기를 말한다. 강의 순우리말은 '가람'이며, 한자어원인 강(江)자는 본래 중국의 장강(양쯔강)을 가리키던 글자였으나 의미가 확대되어 지금의 모든 강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 강(江)과 내(川)를 합쳐서 하천(河川)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크고 작은 모든 하천을 망라해서 그냥 하천이라 부르지만, 하천 중에서 크고 길게 흐르는 하(河)를 특별히 강이라 부른다. 한강, 낙동강, 대동강, 금강 등과 같이 주요 하천들의 이름 뒤에는 '江'이 붙어 있다.
백마강의 생태환경
- 한국 하천이 대부분 하류에서 곡류하고 있는데, 백마강 유역은 금강 하류 중에 곡류가 뚜렷한 곳이다. 백마강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공주를 지나 청양군 청남면, 부여군 부여읍 및 규암면에 인접한 지역이다. 이 일대에서 백마강은 서남류하는데, 북동으로부터 많은 강이 흘러들어 부여 부근에서 지천, 은산천(恩山川), 구룡천, 금천(金川)이 합류한다. 백마강과 이들 하천이 만나는 지역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 동남부 구릉지대는 백마강 연변의 부여읍 남부와 장암면, 석성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저산성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부 저지대는 동남부 구릉지대의 남쪽, 즉 양화면, 임천면, 세도면의 금강 본류 유역과 석성면, 초촌면의 석성천 유역에 발달된 충적평야지대로서, 이 지대는 중앙부 저지대의 충적평야와 근본적으로 같은 발달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평야지대이다.
- 백마강 유역의 기온분포는 평균 11.8℃이며, 최저 2.5℃(1월), 최고 25.3℃(8월)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11㎜이며 강수량의 60%가량이 여름철인 6∼9월 사이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 중 7월 강수량이 30%를 차지한다.
백마강의 지형특징
- 백마강의 지질은 부여군의 지질과 비슷하며 부여군의 지질은 대체로 가장 오래된 선캄브리아기 운모편암과 편마암과 중생대의 쥐라기에 나타난 남포층과 화강암류, 백악기에 나타나는 공주층군, 신생대 제4기에 나타난 충적층으로 확인되었다. 부여군 일대는 차령산맥의 여맥이 침식되어 산세가 온유하여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백마강은 부소산(扶蘇山)을 감돌아 크게 북동에서 남서로 돌아 흐르면서 부소산 동쪽을 침식하여 이른바 공격사면(攻擊斜面)의 절벽을 발달시키고 서쪽에는 넓은 퇴적사면(堆積斜面)을 발달시킨다.
- 백마강 동안(東岸)에는 부여읍이 위치하며, 읍의 남반부는 서안(西岸)의 규암(窺巖)의 공격사면에 대한 넓은 퇴적사면이 위치하고 있다. 백마강의 공격사면은 수심이 깊어 규암나루와 같은 금강 하운의 요충이 되었다. 한편 백마강 일대의 퇴적사면은 범람원이 되어 하상의 퇴적 상승으로 하중도(河中島)나 배후습지(背後濕地)로 변한 곳이 많으며 곳곳에 하적호(河跡湖)도 남아 있다. 부여읍·규암면·장암면·세도면·양화면에는 백마강 양안에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이들 평야 지대는 논으로 개간되어 한국의 주요한 미곡 생산지가 되고 있다. 뒤쪽에 천연의 백마강을 끼고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가지고 있는 부여는 백제 중흥의 웅지를 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 백마강 일대는 538년(성왕 16)에 국도를 웅진에서 사비성(泗沘城)인 부여로 옮겨, 660년(의자왕 20)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심장부였다. 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에는 부소산성·군창지(軍倉址)·고란사(皐蘭寺) 등의 사적이 있으며, 동쪽 끝 약 100m 높이의 단애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낙화암(落花巖)이 있다. 이 지점이 바로 백마강 곡류의 공격사면이다. 백제 때의 요새로 660년에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군사가 쉽게 상륙하여 백제군을 치고 신라군과 연합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던 곳이다. 663년(문무왕 3)에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와 일본의 수군(水軍)과 나당연합의 수군이 격전한 백촌강(白村江)의 싸움터도 여기이다.
백마강 유역의 풍경
백마강은 금강본류의 일부로서 백제 왕도인 부여를 휘감으며 흐르는 16㎞ 구간을 칭한다. 일찍이 백제 사비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하여 백마강 옆 부소산성을 도읍지로 정하여 백제문화를 꽃피워 왔다. 백제의 궁녀와 아녀자들이 충절과 굳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뛰어내리는 모습이 마치 꽃잎이 날리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낙화암은 세계적인 스토리와 문화적 유산으로 대표된다. 주변에는 백제 제30대 무왕 서동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궁남지, 백제 6대왕이 잠들어 있는 백제왕릉원, 천년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정림사지5층석탑, 백제공예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를 전시하고 있는 국립부여박물관, 찬란한 백제문화를 오늘로 이어주는 백제역사재현단지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조룡대(釣龍臺)
- 충남 부여군 백마강(白馬江)에 있는 수중암(水中岩).낙화암(落花岩)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 모양의 바위이다. 옛날 당(唐)나라 군사가 백제의 왕성을 공격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수소문하여 그 연유를 알아내고는, 수중암에 걸터앉아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강물 속에서 백제 무왕(武王:선왕)의 화신인 청룡을 낚아 올림으로써 용의 조화를 막고 풍랑을 멎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백화정(百花亭)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금강(백마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부여군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북쪽 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당시 궁녀 3천여 명이 이곳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 백화정은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세운 것이다.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 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해 두었으며,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화무늬를 그려 놓았다.
천정대
- 천정대는 백제시대 산악(山岳)신앙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설화가 깃든 곳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재상(宰相)을 선출할 때 그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 봉함한 뒤 이곳에 놓아두었다가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곳의 이름을 '정사암(政事岩)'이라 불렀다고 한다. 재상을 임명하는 일은 중요한 일인 만큼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하였던 고대 정치사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주장산성과 백제 도성의 주축인 부소산성이 한눈에 들어와 명승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주변의 벼랑에는 임금바위․신하바위 등 기암(寄巖)들이 많이 있다.
- 천정대 주변에는 백제시대의 연꽃무늬수막새 기와를 비롯한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에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향기가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백제보(311m)는 백마강을 지키기 위하여 돌아온 계백장군의 계백위환(階伯衛還)을 테마로 하여 말을 타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계백장군을 형상화하여 수문장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백제보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인 금강문화관에는 4대강 홍보존, 금강특화존 등이 있으며, 전망대에서는 백마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수북정
- 이곳은 부여팔경(扶餘八景)의 하나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동에는 부소산(扶蘇山)과 나성(羅城)이 있고 정자 밑에는 백마강(白馬江)이 맑게 흐르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양주(楊州) 목사(牧使) 김흥국(金興國)(1557∼1623)이 건립하였다 하며,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불린다. 김흥국(金興國)은 김장생(金長生), 신흠(申欽) 등과 친교가 매우 깊었으며, 지금도 신흠의 수북정(水北亭) 팔경시판(八景詩板)이 걸려 있다. 수북정 아래쪽에 있는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시대 왕이 왕흥사(王興寺)에 행차할 때 이 바위를 거쳐가곤 했는데, 왕이 도착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했다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자온대라 불려오며 암벽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자온대(自溫臺)라고 쓴 친필이 음각 유존(遺存)되어 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강〉, 《나무위키》
- 〈백마강〉, 《위키백과》
- 〈백마강(白馬江)〉, 《두산백과》
- 〈백마강(白馬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류재근・이경수 박사, 〈개천을 잘 관리해야 강(江)이 산다〉, 《워터저널》, 2021-09-01
- 김갑수 기자, 〈"부여를 걷자"…한국관광공사 백마강길 추천〉, 《굿모닝충청》, 2018-11-16
- 〈강(江)의 모든 것 한 권에… ‘한국 하천 안내지도’ 발간〉, 《국토교통부》, 2013-12-05
- 서정호, 〈강이란 무엇인가?〉, 《경상일보》, 2009-06-25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