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백평야
연백평야(延白平野)는 황해도 동남부 해안 지역에 펼쳐진 평야이다.
개요
- 연백평야는 예성강 서쪽에서 해주에 이르며, 연백·벽성의 두 군에 걸쳐 있다. 멸악산맥의 여맥들 사이로 흐르는 예성강·한교천(漢橋川)·나진포천(羅津浦川)·풍천(楓川)·화양천(花陽川) 등의 유역에 발달된 평야이다. 강화도·교동도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 연백 지방과 한 문화권을 이루는 데 주요한 몫을 하였다. 연백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연안(延安)은 농산물의 집산 등이 이루어지는 상업·경제의 중심지이며 군청 소재지이다. 이곳에는 1608년에 세워진 임진왜란 3대 전첩의 하나인 연성전첩을 기념하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가 있으며, 1555년(명종 10)에 쌓고 1591년(선조 24)에 증축한 연안읍성(延安邑城)이 있다. 또 읍의 남쪽에 있던 남대지(南大池)는 옛날 한국 삼대지(三大池) 중의 하나로 유명하였으나 관개되어 옥토로 변하였다. 온정면에 있는 연안온천은 북쪽의 배천온천(白川溫泉)과 함께 유명하다. 배천온천은 일찍이 세종이 요양하였다고 하여 귀족과 부유층들의 요양지가 되었고, 천질(泉質)이 매우 좋고 교통도 편리하여 각지에서 많은 요양객들이 찾아들었다. 구읍(舊邑)인 배천 북부의 치악산(雉岳山)은 경승지이며 고구려 시대의 고성(古城)인 배천산성(白川山城) 역시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이다. 이 밖에도 명승고적으로 해월면 토현리의 중흥궁지(重興宮址), 호동면 봉화리에 있는 각산(角山) 및 산록의 나루터 각산진(角山津) 등 많은 사적들이 있다.[1]
- 연백평야는 황남(북한) 동남부 해안지역에 펼쳐진 평야이다. 해주만과 예성강 하류 사이에 있으며, 청단·연안· 배천의 3군에 걸쳐 있다. 예성강·한교천·화양천· 어사천 유역에 발달된, 해안의 융기작용과 하천의 충적작용으로 이루어진 평야이다. 북한에서 가장 따뜻한 지역에 속하며, 연평균기온 10℃, 1월 평균기온 -5.4℃, 8월 평균기온 24.6℃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100mm이다. 연백평야와 해안의 간석지에는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 완공된 연해수리조합·황해수리조합 등의 관개시설에 힘입어 품질 좋은 '연백쌀'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내륙의 구릉지에서는 보리·밀·콩·팥·옥수수 등의 잡곡류와, 특용작물인 목화·대마 및 채소류 등을 생산한다. 그 밖에 사과·배·복숭아·포도 등의 과일이 산출된다. 또 평야의 지반이 낮은 논에서는 토탄을 채취하여 땔감으로 쓰고 있다. 이것은 바닷가 모래톱 안쪽의 석호 근처에 무성하였던 식물이 하천과 조류의 퇴적작용으로 땅에 파묻혀 탄화(炭化)된 것이다. 교통면에서 볼 때 이곳은 경기도와 해주지방을 잇는 중간 통과지대이다. 토해선(토성∼해주) 철도와 경의가도(서울∼신의주)가 거의 일치하게 동서로 관통하고, 지방도가 사방으로 통한다. 근대적 교통노선이 설치되기 전에는 벽란도(碧蘭渡)가 두 지역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몫을 하였다. 특히 강화도· 교동도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해상교통이 한 문화권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평야의 중심도시인 연안은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배천온천은 일찍이 세종대왕이 요양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2]
연백평야의 지형
- 연백평야의 대부분은 재령평야(載寧平野)의 형성 과정과 같이 해안의 융기작용(隆起作用)과 하천의 충적작용(沖積作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연백지방은 원래 북쪽의 멸악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지를 반도(半島)로 하고 그 동쪽과 서쪽은 만(灣)으로 둘러싸였던 것인데 그 뒤에 해안의 연속적인 융기작용과 한강·예성강 등 여러 하천에서 밀려 내려오는 많은 토사와 거센 조수(潮水)에 의한 퇴적작용으로 넓은 연안평야를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내륙에 남아 있는 해식동(海蝕洞)이나 해안에 발달한 해안단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 융기해안은 일반적으로 해저의 경사가 완만하고 얕은 바다가 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 지역 일대의 바다는 대단히 얕다.
- 호동면·호남면·온정면 부근에서는 바다에서 퇴적한 것으로 보이는 원력(圓礫 : 암석이 기계적으로 파쇄된 뒤 유수 등에 의한 연마작용으로 모난 곳이 둥글게 된 조약돌 또는 그 집합체)·조가비 등이 발견된다. 한편, 연백평야의 10개 면에 걸친 지역에서 토탄(土炭)이 나는데 이것은 연안주(沿岸洲) 안쪽에 있었던 석호 부근에 무성하였던 식물이 하천과 조류의 퇴적작용으로 석호와 함께 매몰되어 오랜 기간을 지나는 중에 탄화(炭化)된 것이다.
- 온정면에 위치한 천대산(天臺山)은 해중의 한 작은 섬이었다고도 하며, 석산면 부근 바다로부터 10여㎞ 되는 곳의 밭에서 배의 돛대가 출토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 지명에 있어서도 호동면·호서면·해성면 등의 면(面) 이름과, 은천면의 주산동·성호리, 해월면의 율포동·아호동, 성서면의 월포동, 온정면의 동성호·서성호, 유곡면의 용소 등이 있는데, 이러한 지명들은 현재는 아니지만 과거에는 그곳이 해포(海浦) 또는 호소의 소재지였음을 밝혀주고 있다.
연백평야의 기후와 생태
- 기후는 북쪽에 멸악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고, 남쪽은 바다에 면하여 있어 비교적 온화하다. 연평균기온은 10∼11℃ 내외이며 연안의 1월 평균기온은 -5.3℃, 8월 평균기온은 25.4℃에 달한다. 연강수량은 1,000∼1,100㎜ 내외이다.
- 연백평야와 해안의 간석지에는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하였는데, 1930년 완공된 연해수리조합(延海水利組合)과 1934년 완공된 황해수리조합(黃海水利組合)을 비롯한 관개시설로써 '곡창연백'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생산량이 많고 품질이 좋기로 이름난 연백쌀의 산지인 연백평야의 조망은 지평선에 이어지는 명실공히 황금만파(黃金萬波)의 대곡창이다.
- 내륙의 구릉지에서는 밭농사로 맥류(보리·밀·메밀)·두류(콩·팥·녹두·완두)·잡곡류(조·피·옥수수), 그리고 특용작물로서 면화·양잠·대마·완초·깨·소채류 등을 생산한다. 과수도 사과·배·복숭아·포도 등이 골고루 산출된다.
- 연백평야의 주요 광산물로는 토탄을 들 수 있는데 평야의 지반이 낮은 논에서는 지하 60∼90㎝ 정도 되는 곳에 두께 12∼20m 정도의 토탄층이 매장되어 있어 논농사 지대 주민들의 연료로 이용되고 있다. 평야 내의 교통은 수륙 양면이 모두 편리하다. 육상교통으로는 경기도 토성과 해주를 연결하는 토해선(土海線)이 평야를 동서로 관통하고 있어 경의선(京義線)과 쉽게 연결된다. 또 경의가도(京義街道)에 인접해 있고 지방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여 육로의 교통이 편리하다.
- 동쪽의 예성강 유역에는 김야포(金野浦)·금곡포(金谷浦) 등이 있는데, 그중에도 유곡면의 금곡포는 먼 옛날부터 선박의 출입 항이었다. 이곳에는 금곡포창(金谷浦倉)이 있어 연백평야를 비롯한 황해도 일대의 전세(田稅)를 수납하여 서울로 가져갔다. 한편, 예성강 하류 강어구인 해월면의 벽란도(碧瀾渡)는 서북 방면에서 개경(開京)으로 가는 큰 통로였다. 이 밖에도 해안에는 옥산포(玉山浦)·고미포(姑美浦)·나진포(羅津浦)·백석포(白石浦)·신포(新浦)·수래포(水來浦)·거래포(去來浦)·불당포(佛堂浦) 등이 있어 해운이 발달하였다.
연백평야 지역의 연백군
- 황해도 동남부에 있던 군(郡). 면적은 약 935.6㎢. 광복 당시 1읍 19면으로 되어 있었으며, 군청은 연안읍 연성리에 있었다. 1944년 당시 인구가 20만 명이 넘을 정도로 큰 군이었다. 한국 3대 평야 중 하나인 연백평야가 이 군뿐만 아니라 이웃 벽성군의 동쪽까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쌀이 있으며, 바다에서는 조기·새우, 땅에서는 토탄(土炭)이 있다. 연백군 대다수 지역이 남한에 속했지만 38선 이북 지역은 북한에 넘어갔고 이북 지역에 저수지와 관개시설 다수가 위치한 관계로 전쟁 직전인 1950년에는 농번기에 북한이 물을 통제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 치하에 점령된 후 북한은 38선 이남지역에 남연백군을 설치했다가 군면리 대폐합을 단행하면서 1952년 12월에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철도 노선으로는 토해선(土海線)이 있었으나, 한국전쟁당시 예성강철교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본 북한이 예성강철교를 파괴하고 노선 일부를 끊어놓은 다음, 일부 구간을 북쪽으로 이설하여 현재는 배천선이 군 내부를 가로지른다.[3]
- 1930년 수리 관개 사업 이전에는 중남부 지방보다는 오히려 북부 산간 지방의 농업 기반이 월등하였다. 그러나 화양천 · 풍천 · 한교천 등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고, 간척지에 수리 관개를 하면서부터 중 · 남부 지방은 전국 3대 평야의 하나인 연백평야를 이루게 되었다. 이 군은 한반도 3대 곡창의 하나인 연백평야가 있어 예로부터 주민들의 생활이 풍요하였다. 그리하여 옛 읍치(邑治)인 연안에는 누(樓) · 정(亭) · 대(臺) 등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연안읍 연성리에 있는 취원루(聚遠樓)는 1357년(공민왕 6)에 안렴사주6 이방(李昉)과 연안부사 김인백(金仁白)이 창건하였다.
- 연백군의 농업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농업의 중심이 북부 산간지대(괘궁 · 목단 · 봉서 · 봉북 · 석산 · 금산 · 은천 · 유곡)에서 남부의 평야 지대(용도 · 해룡 · 송봉 · 연안 · 호남 · 해성 · 호동 · 온정 · 해월)로 이동되면서 연백평야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곡창 지대를 이루며, 농업이 주산업으로 부상되었다. 이 평야를 관개하는 남대지가 있어 더욱 편리하다. 전체 경지면적은 570.97㎢이며, 이 가운데 논이 337.44㎢, 밭이 233.52㎢(1937년 현재)이다. 농가 호수는 전체 가구 수의 80.4%에 해당되는 2만 4694호로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밀 · 콩 · 팥 · 조 · 피 · 메밀 · 기장 · 감자 · 고구마 · 돼지감자 · 배추 · 무 · 파 · 미나리 · 상추 등이며, 이 밖에 오이 · 가지 · 호박 · 참외 · 수박 등이 생산된다. 광산물은 금 · 은 · 토탄주9이 대표적이며, 금광으로 해월면 금산리에 국근광산(菊根鑛山), 문산리에 율포광산(栗浦鑛山), 은천면 비봉리에 은봉광산(銀峰鑛山)이 있다. 연안읍 연백평야 지대의 지하 1m 내외의 땅속에는 양질의 토탄이 광범위하게 매장되어 연료로 사용되며, 일부는 서울 · 인천 등지로 반출된다.
- 1954년 황해도가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로 분리되면서 연안군 · 배천군은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67년 온정면의 행정리와 호동면의 추정리 일부가 각각 분리되어 배천군 역구도리로 바뀌었으며, 해월면의 금산리 일부는 호동면의 봉화리와 합쳐졌다. 1974년 5월 용도면 대평리 · 심계리 일부는 청단군에 들어갔다. 연안 지역에서는 연백평야의 유명한 쌀이 생산되며, 그 밖에 박하 · 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된다. 공업 제품으로는 피복 · 기와 · 도자기 · 비단 · 초물공예품 · 수지그릇 등이 생산되며, 특히 초물의 생산품은 수출되고 있다.
한국의 평야
- 평야는 기복이 거의 없는 평평하고 넓은 땅을 말한다. 만들어진 원인에 따라서 크게 퇴적 평야, 구조평야로 크게 나눈다. 퇴적평야는 충적평야라고도 하며 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주로 형성된다. 퇴적평야의 종류로는 선상지(扇狀地), 범람원(汎濫原), 삼각주(三角洲), 해안평야(海岸平野), 곡저평야(谷底平野) 등이 있다. 구조평야는 침식평야라고도 하며, 오랜 지질대의 침식으로 형성된다. 구조평야의 종류로는 분지 등이 있다. 평야에는 주로 교통이 발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거주지역으로 적당하여, 농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형성된다.
- 한국의 평야(平野)는 주로 한반도의 서부와 남부 해안, 큰 강의 하류 지역에 넓게 형성되어 있다. 교통기관이 발달하고, 평야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오던 중 상공업이 성행하여 도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평야 지대의 농촌은 일반적으로 북쪽의 낮은 산을 등지고 논과 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북쪽의 산은 겨울철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며, 남향의 산기슭은 햇볕을 잘 받아 따뜻하게 해준다. 그리고 강물이나 시냇물은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하다.
- 평야 지역의 농촌에서는 물을 대기 쉬우면 논으로 이용하며, 홍수 때 물에 잠기던 곳을 둑으로 막고 수문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바닷물을 막아 물을 빼내고 논으로 만드는가 하면 경사진 곳은 층층이 논두렁을 쌓아 논밭으로 개간하기도 하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마련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는 만경강 유역의 호남평야와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로서 갈수록 현대화가 추진, 발전되고 있다. 또한 물이 많지 않은 곳에는 밭을 일구어 보리, 감자, 옥수수 등 작물과 배추, 무 등 채소를 재배한다.
토해선(土海線)
- 경의선의 토성(土城)역에서 황해도 해주를 연결하는 철도로 그 길이는 81.7km이다. 경의선과 해주를 연결시키는 동시에 연백평야(延白平野)의 농산물 수송을 위하여 건설된 철도이다. 1932년에 전구간이 개통되었으며 길이 81.7km이다.
- 경의선과 해주를 연결시키는 동시에 연백평야(延白平野)의 농산물 수송을 위하여 건설된 철도이다. 1931년 12월 21일 동해주(東海州)와 연안(延安) 사이가 개통되고, 1932년 9월 1일 토성까지의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동해주에서 황해선(黃海線)과, 해주에서 옹진선(甕津線)과 각각 연결되는데, 모두 협궤(狹軌)로 되어 있다.
동영상
각주
- ↑ 〈연백평야 (延白平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연백평야 (延白平野)〉, 《두산백과》
- ↑ 〈연백군〉, 《나무위키》
참고자료
- 〈평야〉, 《나무위키》
- 〈평야〉, 《위키백과》
- 〈연백군〉, 《나무위키》
- 〈한국의 평야〉, 《위키백과》
- 〈연백평야 (延白平野)〉, 《두산백과》
- 〈평야(平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연백군 (延白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연백평야 (延白平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상락 소설가, 〈(그 시절 우리는) 염전·소금장수③ 황해도 연백으로 소금 팔러 가다〉, 《한국농정》, 2021-09-19
- 윤태현 기자, 〈북한 연백평야를 한눈에…강화군 화개산 정상에 전망대 건설〉, 《연합뉴스》, 2019-12-26
- 김기협 역사학자, 〈NLL 뺨치는 연백평야 미스터리를 아십니까?〉, 《프레시안》, 2013-07-05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