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평야
김포평야(金浦平野)는 경기도 김포시의 한강 하류 남안에 발달된 퇴적평야이다. 경기도 파주시, 고양시, 김포시에 걸쳐 있다. 토양이 비옥하여 질이 좋은 쌀 산지로 알려져 있고 인삼 재배로도 유명하며, 무연탄ㆍ토탄(土炭) 따위가 소량으로 산출된다.
개요
- 김포평야는 한강 하류의 서안에 펼쳐진 평야이며 해발고도 300m이다. 경기 파주시·고양시·김포시에 걸친 평야. 김포시 일대 평야의 기반암은 호상편마암으로 이루어지고, 남부 일대만 엷은 퇴적층으로 덮여 있다. 김포시 북서부의 문수산(文殊山:376m) 일대의 구릉은 김포평야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구릉지를 이룬다. 고양시의 한강변은 대부분 충적층으로 덮여 있으며, 해발고도가 극히 낮기 때문에 항상 침수의 위험을 안고 있다. 토양은 비옥하여 주요 쌀 경작지대를 이루며, 김포쌀은 질이 좋아 예로부터 통진미(通津米)로 알려졌다. [1]
- 김포평야는 경기도 김포시의 굴포천(掘浦川) 유역과 한강 하류 남안에 발달된 퇴적평야이다. 광복 후에는 굴포천 하류의 신곡리 양수장, 걸포천 하류의 사우동 양수장 등이 건설되면서 과거에 갈대밭이었던 김포평야가 수리안전답으로 개간되었다. 특히 신곡리 양수장은 1970년대 초에 양ㆍ배수 겸용의 수리시설로 대폭 증설되었고, 이곳에서 퍼 올린 물은 2단 또는 3단 양수장을 통해 김포시 전역으로 보내지고 있다.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밥맛 좋은 김포미, 이른바 '통진미(通津米)'는 임금님의 수랏상에 올랐던 진상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통진면 가현리에서는 5,000년 전에 탄화(炭化)된 쌀이 발견됨으로써 김포평야에서 오래전부터 벼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부족한 수도권의 택지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김포평야 일대에는 많은 아파트들이 건설되었다. 그 결과 김포평야의 토지이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김포시의 풍무동ㆍ감정동ㆍ장기동ㆍ걸포동ㆍ북변동ㆍ사우동 등은 수도권의 새로운 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2]
- 김포평야는 굴포천과 한강 하류 남안에 형성된 퇴적평야로, 김포시를 중심으로 인천, 부천, 서울에 걸쳐 발달해 있다. 통진평야라고도 한다. 핵심부는 하천이 범람하여 침수하는 범람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은 기복이 작은 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침수가 잦은 배후습지에는 일제강점기 초부터 인공제방이 축조되었다. 본래 밭으로 많이 이용되어 특히 통진미가 수랏상에 오르던 진상미라 하여 유명하였다. 현대에 들어 주거지가 들어서며 토지이용이 크게 변화하였다. 2019년 9월 28일에 개통한 김포 골드라인의 경우, 김포평야의 황금 빛깔로 물든 논의 의미를 함축한 뜻에서 비롯된 수도권 지역의 경전철 노선 명칭으로 사용한 바 있다.[3]
평야의 구분
- 평야는 형성 원인에 따라 크게 퇴적평야와 침식평야로 나눌 수 있다.
- 퇴적평야는 하천·빙하·바람 등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평야를 말한다. 가장 보편적인 퇴적평야는 하천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이를 가리켜 충적평야라고 한다. 선상지, 범람원, 삼각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빙하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퇴적평야의 예로는 빙력토 평원(氷礫土平原)이 있다.
- 침식평야는 하천·빙하·바람·파랑 등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평야를 말하며, 대표적인 예로는 구조평야가 있다. 구조평야는 지질구조가 그대로 평야를 이룬 지형을 의미하는데, 과거 지질시대에 형성된 지층이 오랜 기간 지각변동을 받지 않은 채로 하천·빙하·바람 등의 침식작용을 받아 남아있는 평야이다. 특히 구조평야는 대륙의 규모로 펼쳐져 있는 대지형(大地形)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 형성되는 지형적 특성에 따라 해안가에 형성되는 해안평야나 이미 형성된 골짜기에 형성되는 곡저평야(谷底平野), 한국의 대하천 하류에 펼쳐진 평야와 같은 곳들은 침식평야와 퇴적평야의 성격을 모두 가지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평야로 꼽히는 호남평야도 이 두 가지가 모두 작용하여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평야
- 한국의 평야(平野)는 주로 한반도의 서부와 남부 해안, 큰 강의 하류 지역에 넓게 형성되어 있다. 교통기관이 발달하고, 평야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오던 중 상공업이 성행하여 도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평야 지대의 농촌은 일반적으로 북쪽의 낮은 산을 등지고 논과 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북쪽의 산은 겨울철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며, 남향의 산기슭은 햇볕을 잘 받아 따뜻하게 해준다. 그리고 강물이나 시냇물은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하다.
- 평야 지역의 농촌에서는 물을 대기 쉬우면 논으로 이용하며, 홍수 때 물에 잠기던 곳을 둑으로 막고 수문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바닷물을 막아 물을 빼내고 논으로 만드는가 하면 경사진 곳은 층층이 논두렁을 쌓아 논밭으로 개간하기도 하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마련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는 만경강 유역의 호남평야와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로서 갈수록 현대화가 추진, 발전되고 있다. 또한 물이 많지 않은 곳에는 밭을 일구어 보리, 감자, 옥수수 등 작물과 배추, 무 등 채소를 재배한다.[4]
- 한국의 평야는 대부분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평야의 핵심부는 대개 하천의 토사가 쌓여 이루어진 범람원이고, 평야에서 '들'이라고 불리는 곳은 거의 전부 이러한 범람원이다. 평야 주변의 구릉지, 즉 야산도 기복이 아주 작으면 평야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은 여러 면에서 범람원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하천의 범람에 의한 침수의 위험이 없을 뿐 아니라 대개 기반암의 풍화토인 적색토로 덮여 있고, 밭ㆍ과수원ㆍ목장ㆍ임야 등으로 이용된다.
김포평야의 유래
- 경기도 파주시 · 김포시 · 고양시에 걸쳐 있는 평야이다. 지명은 '김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기읍지』를 통해 김포와 관련하여 '투금탄(投金灘) · 투금강(投金江) · 투금뢰(投金瀨)'라고 부르는 강의 이름이 붙은 유래가 전해진다.
- 『성주 이씨 가승』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때 이곳에 살고 있던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강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동생이 금덩어리 두 개를 줍게 되어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그러나 배에 탄 동생은 수중에 금덩어리가 생기고 나니 평소에 존경하던 형이 미워져 이 금덩어리는 좋은 물건이 아니라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고, 이를 본 형 또한, 동생의 말이 옳다고 하여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 때문에 이 여울을 '금을 던진 여울'이란 뜻의 '투금뢰'라고 부른 데서 김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 김포평야는 한강 하류의 서안 지대로, 해발 고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항상 침수의 위험을 안고 있으나 토양은 매우 비옥하여, 이곳에서 재배되는 쌀은 유명하다.
김포평야의 자연환경
- 평야 지대의 농촌은 일반적으로 북쪽의 낮은 산을 등지고 논과 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북쪽의 산은 겨울철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며, 남향의 산기슭은 햇볕을 잘 받아 따뜻하게 해준다. 그리고 강물이나 시냇물은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하다. 평야 지역의 농촌에서는 물을 대기 쉬우면 논으로 이용하며, 홍수 때 물에 잠기던 곳을 둑으로 막고 수문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바닷물을 막아 물을 빼내고 논으로 만드는가 하면 경사진 곳은 층층이 논두렁을 쌓아 논밭으로 개간하기도 하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마련하기도 한다.
- 김포평야의 핵심부는 큰 홍수가 발생하면 물에 잠기는 범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범람원은 후빙기 해수면 상승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빙기에 깊게 파였던 골짜기에 하천의 토사가 현재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쌓임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람원의 해발고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 범람원은 하천 연안을 따라 분포하는 자연제방과 강물이 역류하는 지류 유역의 배후습지로 구분된다. 자연제방은 인공제방과는 달리 지면이 상당히 넓고 평평한데, 큰 홍수 때만 물에 잠겨 일찍부터 취락의 입지나 밭으로 이용되어 왔다. 자연제방의 뒤에는 고도가 낮아 보통 홍수에도 물에 잠기는 배후습지가 자리한다. 범람원 주변으로는 기복이 아주 작아 평야의 일부로 간주되는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구릉지는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침수위험이 없을 뿐 아니라 대개 기반암의 풍화토인 적색토로 덮여 있고, 밭ㆍ과수원ㆍ목장ㆍ임야 등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범람원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러한 구릉지는 대개 배후의 산지 지역으로 이어진다.
- 김포평야는 굴포천 유역과 한강 하류의 남안인 김포ㆍ인천ㆍ부천ㆍ서울에 걸쳐 발달된 퇴적평야이다. 배후습지가 넓고 저습했던 김포평야는 일제강점기 초부터 인공제방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또한 곡류하천이었던 굴포천의 유로도 직강공사를 통해 반듯하게 펴졌다.
동영상
각주
- ↑ 〈김포평야(金浦平野)〉, 《두산백과》
- ↑ 〈김포평야(金浦平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김포평야〉, 《위키백과》
- ↑ 〈한국의 평야〉, 《위키백과》
참고자료
- 〈평야〉, 《나무위키》
- 〈평야〉, 《위키백과》
- 〈김포평야〉, 《위키백과》
- 〈한국의 평야〉, 《위키백과》
- 〈김포평야(金浦平野)〉, 《두산백과》
- 〈평야(平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포평야(金浦平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스푼북, 〈우리나라 평야 지형은 어떻게 생긴 걸까?〉, 《네이버포스트》, 2022-09-01
- 양미희 기자, 〈김포 구석구석 18 … 김포평야(金浦平野)〉, 《씨티21뉴스》, 2018-09-21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