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
조령(鳥嶺)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조령'은 "새도 넘기 어려운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라고도 한다. 조령을 기준으로, 조령 남쪽 지역을 영남지방이라고 한다.
목차
개요
- 조령은 동경 128°03, 북위 36°45′에 위치하며, 높이는 642m이다. 마역봉(920m)과 깃대봉(835m)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1966년에는 문경 조령 관문이 사적으로, 1981년에는 이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또 2007년에는 문경새재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새재 또는 문경새재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이라 하지만 세상에서는 초점(草岾)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새재는 새나 넘나들 수 있는 험한 고갯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졌고, 초점은 풀이 우거진 고갯길이라는 뜻이다.[1]
- 조령은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고갯길 최고점의 높이는 해발 632m. 백두대간(중 소백산맥)에 있는 1,017m 높이의 조령산을 넘는 것이 고비다. 새재는 조령(鳥嶺)을 우리 말로 읽은 것으로,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도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이기도 하다. 현재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명승 제32호와 사적 제147호(새재에 설치된 관문들('문경 조령 관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좌로), 죽령(우로)과 함께 낙동강 유역(영남)과 한강 유역(기호지방)를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다. 전근대 시절에는 죽령은 자체가 험한데 다 단양의 남한강 협곡 때문에 한산했고, 추풍령은 우회길인데다 옥천과 영동사이에 있는 금강의 협곡들 때문에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조령은 고개가 험한 것을 빼면 한성과 영남을 직선거리에 가깝게 이었고 협곡과 같은 방해물이 적었다. 그 덕분에 청주에서 회인과 보은을 거쳐 상주로 가는 고개인 화령과 함께 주요 고개로 자주 이용이 되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영남의 선비들이 화령과 함께 그야말로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죽령으로 향하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 듣고(聞慶)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2]
- 조령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에 있는 고개이다. 2007년 12월 17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개척한 관도로 영남에서 소백산맥의 준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며 정상 높이 642m의 고개이다. 주흘산과 조령산이 이루는 험준한 지형은 국방상으로 중요한 요새이며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이후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3개의 관문과 부속성, 관방시설 등을 축조하였다. 새재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설과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에 있는 고개라는 설이 있다. 한편 옛 문헌을 인용하여 초점(草岾), 즉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주장도 있다. 일명 조령(鳥嶺)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으며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다녔던 과거 길이 남아있다. 또한 주변에 여궁폭포, 용추계곡 등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원터, 교구정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들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 관광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42-8번지 일대 주변 3,768,307㎡의 구역이 2007년 12월 17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3]
조령의 명칭 유래
- 삼국시대에는 인근 월악산 자락에 위치한 하늘재(계립령)가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나, 신라통일기에 처음 이곳이 등장하고 고려말 공민왕 때에 이르러 초점(草岾)으로 불리다가 조선태종 때 옛길인 하늘재를 대신하여 본격적인 관로로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성종 ~ 중종기에 이르러 이곳을 조령(鳥嶺)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새재"인데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이며 한자로 표기하면 초점(草岾), 조령(鳥嶺)이 된다.
- 조령이라는 명칭은 신라 통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문경새재의 새재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 공민왕 때에 육운으로 처음 개통되어 초점(草岾)으로 불리다가 조선 성종 ~ 중종기에 이르러 이곳을 조령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원래 명칭인 "새재"를 한자로 표기함이 각각 달라, 초점(草岾), 조령(鳥嶺)으로 명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 삼관문 위 북쪽 대간능선은 마역봉에서 월악산인근 포암산으로 이어진다. 이 대간 능선주변에는 문경새재 외에 하늘재, 한훤령, 지릅재, 계립령 등등.. 많은 고개 명칭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남북을 잇는 주요 고갯길들이 발달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재는 충주시 미륵리와 문경시 관음리를 연결하는 포암산과 월항삼봉 사이의 고개로 삼국시대 신라가 최초로 개척한 길이다. 한훤령이라고도 부르는 하늘재는 조령의 개통과 더불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계립령은 그 위치가 확실치 않다. 대개 하늘재를 일컫는 다른 말로 인식되고는 있으나 항간의 속설에 의하면 충주시 사문리와 미륵리를 잇는 오늘날의 마패봉 아래 지릅재를 일컫는다고 한다.
조령의 생태환경
- 조령에는 백악기 석영반암, 흑운모화강암, 각섬석 화강암과 시대 미상의 녹니석편암, 견운모편암, 천매암질 흑운모편암, 합력류질 천매암질암, 백화리 각석암, 흑색스레이트, 각종 천매암류와 고생대 오로도비스기의 회색결정질석회암, 석회규산연암 등이 분포한다.
- 조령의 동쪽 사면은 남쪽으로 흐르는 조령천(鳥嶺川)의 상류 하곡으로 통하고, 서쪽 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팔봉강(八峯江)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주흘산(1,106m)과 조령산(鳥嶺山, 1,020m) 계곡 내에 위치한다. 표고는 400m 이상이 45.2%, 500~500m는 28%에 해당한다. 이 지역의 모암은 대부분 화강암으로서 비교적 강산성의 척박한 토양을 이룬다. 식물은 총 114과 888종이 출현하였고, 보호상 중요한 식물군락은 느티나무, 서어나무의 파편군락, 갈대군락, 달뿌리군락, 부처손, 바위손, 구실사리군락 등의 양치식물류이다. 포유류는 11종, 양서·파충류는 7종, 조류는 47종, 곤충은 241종으로 조사되었다.
- 조령관문과 영남로 주변의 유적지들, 조령천 곳곳의 옥녀탕·용추·선녀소 등을 포함한다. 주변에 수옥폭포(漱玉瀑布)·이체불(二體佛)·혜국사(惠國寺)·진남교(鎭南橋)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절경이 많다. 동화원(桐華院)을 비롯하여 진(鎭)과 군창(軍倉)터 및 경상감사의 신임자와 후임자가 만나 서로 공문서에 날인하였다는 교구정(交龜亭)터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수안보온천과 월악산국립공원이 근접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충주와 문경, 점촌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이 이화령을 통과하며 접근도로는 문경읍 입구에서 조령 제1관문까지 약 5㎞ 정도의 2차선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조령 주변
- 철도가 없던 옛날에 서울∼부산 간의 주요 도로는 대개 이 고개를 통하였다. 동서 양편이 화강암의 절벽으로 되어 천연의 요새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축성한 제1·2·3관문과 부속 성벽으로 된 문경 조령 관문이 있다. 이 관문들은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과 같은 방어 시설을 축조하기 위하여 현지 실측이 시행되었다.
-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무르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여 만든 첫 번째 시설이 지금의 중성(中城)이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에 크게 증축되어 비로소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2관문이다.
- 숙종 때 제2관문에서 3㎞ 떨어진 곳에 남적(南賊)을 방비할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 주흘관)이라 하였다. 이것은 1890년대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또 숙종 때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고개 위에 조령산성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조령고개에 위치한다.
- 제3관문은 육축(陸築)만 남겨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에 복원되었다. 이들 제1·2·3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 즉 서편의 마폐산·조령산을 연결하는 산릉(山稜)과 동편의 부봉(釜峯)·주흘산(主屹山)을 연결하는 능선 사이의 조령천 계곡에 위치하여, 관문 좌우의 성벽이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문경 조령관문 (聞慶 鳥嶺關門)
- 조령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 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해 조령에 대대적으로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하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 조동문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후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후부터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에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곡관이라 했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조령 산불됴심 표석(鳥嶺 산불됴심 標石)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조령(鳥嶺)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산불조심 표석.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령산자연휴양림(鳥嶺山自然休養林)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있는 자연휴양림. 1995년 1월 25일에 개장했으며, 구역면적은 766만㎡, 1일 최대 수용인원은 1,600명, 최적 인원은 800명이다. 충청북도 도청에서 관리한다.
-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 해발 1,025m의 조령산 기슭에 있는 휴양림으로 군락을 이룬 노송과 참나무 외에 다양한 희귀수목이 분포된 울창한 숲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해발 967m의 신선봉과, 해발 927m의 마역봉 사이를 잇는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며 15m의 기암절벽으로 쏟아지는 수목폭포가 있다. 조령산까지 길고 짧은 몇 갈래의 등산로가 있다.
-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임산물판매장, 삼림욕장, 정자, 야외무대, 야외교실 등의 시설이 있고 눈썰매와 물썰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사계절썰매장과 높이 5.3m, 너비 2.5m, 무게 44t의 거대하고 웅장한 휘호석이 있다. 주변에 수안보온천과 문경새재도립공원,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조령삼관문, 마역봉, 소옥폭포, 미륵사지, 송계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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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산〉, 《위키백과》
- 〈산〉, 《나무위키》
- 〈嶺〉, 《나무위키》
- 〈산〉, 《네이버국어사전》
- 〈문경새재〉, 《나무위키》
- 〈문경 조령 관문〉, 《위키백과》
- 〈조령(鳥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경새재(Mungyeongsaejae Pass,聞慶새재)〉, 《두산백과》
- 박상주 편집국장, 〈(가자! 100대명산 ⑪ 조령산) 백두대간 중 최고 험난 구간… ‘한반도의 허리띠’〉, 《우먼타임스》, 2023-01-31
- 이현종 기자, 〈문경새재-관광공사 선정 2월에 가볼만한곳〉, 《서울경제》, 2023-01-31
- 이심건 기자, 〈기암절벽과 산림이 빚어낸 절경, 괴산 조령산〉, 《충청투데이》, 2022-06-24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