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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9일 (일) 04:38 기준 최신판

청계천(淸溪川)
청계천 중류의 인공 방류 거점인 청계광장. (2006년) 지방하천.

청계천(淸溪川)은 서울의 한복판 종로구중구와의 경계에 흐르는 하천이다.

서울 내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와 군자차량사업소 사이)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서울의 도시개발 역사를 상징하는 하천으로도 유명하다. 전근대시기 자연하천에서 시작하여 여러 개천사업을 거쳐 직선화와 복개 작업이 이루어졌고,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었을 당시에는 아예 사라졌다가 이후 복원이 이루어져 자연하천과 인공하천이 혼합된 형태의 하천으로 재탄생되었다.

발원지는 인왕산 수성동계곡을 지나는 옥류동천이라는 설과 자하문 부근 백운동천이라는 설이 있다. 수성동 계곡 안내판에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시가 있기는 하지만, 정설로 공식 확인된 바는 아니다. 옥류동천은 70년대에는 항시 물이 흘렀으며, 90년대까지도 갈수기 외엔 물이 흘렀지만 2019년 현재 발원지 추정 두 개울은 모두 건천으로서 장마 때만 잠시 물이 흐른다.

개요[편집]

청계천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지방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발원지에서부터 잰 본류의 길이는 10.92 km, 유역 면적은 50.96㎢이나,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 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 km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의 관리 하에 공원으로 쓰인다.

역사[편집]

조선~일제강점기[편집]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태종박자청에게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맡겨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자원한 자들에 국가에서 품삯을 주고 고용한 고공들을 동원해 준설, 양안석축(兩岸石築),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 이 공사로서 구불구불하던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이렇게 공사를 해도 자연하천이지만 건천에 가깝고, 서울 시내를 관통하며, 생활오수가 많이 들어오는 관계로 주기적으로 보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반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고도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는 계속 이루어졌다.

청계천 정비는 1917년 경성부에서 제1기 하수도 개수계획을 입안하고 정비 예산을 책정하며 그 시작을 알렸으나, 그 직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 불황이 덮치면서 계획대로 진전되지 못했고, 1920년대 내내 청계천으로 인한 위생 문제와 교통 방해 문제는 경성부협의회의 가장 큰 '처리되지 않은 현안'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 중반 조선총독부와 경성부가 각각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하고, 경성시가지계획을 시행하며 본격적인 도시 계획을 추진하며 투입 예산을 늘리며 해결될 기미를 보였다. 1935년 경성부가 청계천의 지류를 완전 복개, 본류를 일부 복개하여 도로를 확충하고 하수도를 설치하는 방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36년 개최된 경성부 도시계획조사위원회에서는 해당 방안을 확정했고, 총독부에서는 1937년 연말부터 원안보다 청계천 연안 도로의 너비를 2배로 확대하여 청계천 본류도 전부 복개하는 방식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의 태평양 전쟁 개전으로 시정의 방향이 병참기지화 정책 중심으로 흘러감에 따라 공사 속도는 점점 더 느려졌고, 결국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며 자연스레 중단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재개되었다.

현대[편집]

복개 전 판자촌이 즐비한 청계천의 과거 모습

상술된 대로 일부 구간만 끝낸 채 미완으로 남았던 청계천 복개 공사는 6.25 전쟁 이후인 1958년 6월부터 재개되어 1960년 4월에 1단계로 광교~주교(舟橋) 1~4가 간을 완공해서 지상에 너비 50m의 간선도로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7년부터 1976년까지 공사를 진행했고, 1976년 8월 15일에 청계고가도로를 개통하는 것으로 복개공사를 완료했다. 복개구간은 상류에서 성동구 사근동까지 5.4km 구간이었고, 중랑천 합류 지점까지의 2.4km 구간은 복개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당시 공사를 주도한 서울시장은 김현옥, 남산터널과 광화문 지하도, 명동 지하도, 세운상가 등을 건립한 '불도저 시장'이자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로 사퇴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청계고가도로 건설로 인해 청계천은 1976년부터 2003년까지 사라지게 된다.

청계고가도로 시절[편집]

청계고가도로

청계고가도로 시절, 근처 상가에는 이런저런 특이한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과 노점상들이 떼거지로 있었다. 헌책방이나 골동품 상점, 온갖 잡화를 파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청계천을 한번 돌면 탱크(또는 잠수함)를 조립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다. 강풀의 <26년>에서 전두환을 노리는 주인공이 일반 경기용 공기총을 살상용으로 개조해 달라고 의뢰한 공작소도 청계천에 있다는 설정이었다.

1970~80년대 초 무렵의 청계천 일대 전자상가는 세운상가와 더불어 한국의 1세대 컴덕후들에게는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청계천 상업지구는 재개발로 철거되면서 당시 업주들에게 새 요람으로 권장한 곳이 있었는데 그것이 가든파이브였다.

각종 생물 취급도 다양했는데, 수족관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동대문 ~ 동묘앞 구간의 거리는 청계천 열대어상가라고 불리며 물고기 동호인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심지어 복개구간 철거 직전인 2002년에는 그 안에서 새끼 악어의 사체가 나온 적도 있다. 개복이 완료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희귀동물의 성지로 유명했다.

이 지역의 수족관 사이에 조류원도 중간중간 섞여있었으며, 기타 햄스터, 곤충과 파충류를 파는 애완동물 매장이 매우 많이 밀집해있었다. 악어, 거북이 정도는 약과이고, 국내에 수입되는 게 불법이어서 밀수해서만 키울 수 있는 동물들도 쉽게 살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동물들의 관리상태는 매우 나빴다. 햄스터만 해도 여름이면 일사병에 걸려 침을 질질 흘리고, 서로 싸우다 살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햄스터가 있으면 가게 문 닫고 나서 내다 버리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목격되기까지 했다. 아마 위의 새끼 악어도 여기서 팔다 흘러들어갔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2013년까지의 상황이었으나, 2014년 1월에 이 점포들이 대부분 입점해 있던 신발도매상가 D동 관리회사가 A동처럼 이 건물도 신발만 취급하는 전문상가로 전환하면서 2월까지 다수의 점포가 이전 또는 폐점하였다.

그러나 길목의 이점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이전한 업소들은 대부분 먼 곳이 아니라 한 블록에서 두 블록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청계천변의 옛 점포 자리에 새 점포로 가는 약도를 붙여 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길어야 이사한지 1~2달 정도 갈 게 뻔하므로, 관련 업소를 자주 드나들던 위키러라면 아무 생각 없이 방문했다가 어디로 갔나 당황하지 말고 전화로 이전 여부 및 이전 위치를 확인한 후 방문하기를 권한다.

일단 그 시절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고 PC통신도 마니아틱한 느낌이 있었기에 오프라인 쇼핑이 대세였다. 그때 청계천은 불법물도 구할 수 있고 각종 진귀한 것들을 구할 수 있는 매트릭스 같은 은밀한 통로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구경하러 가곤 했다. 지금이야 인터넷 쇼핑이 대세로 자리 잡아 해외직구도 발전하여 오래 전에 단종되어 해외 현지에서도 발품팔아 구하기 힘든 구식 게임기라도 해외 옥션이나 아마존닷컴 중고품을 검색하여 클릭 한번이면 집까지 배달해주는 시대니 실감이 나지 않겠으나, 그 시절만 해도 희귀한 것은 발품을 팔아야 구할 수 있는 시대였다.

지금이야 유튜브에서 클릭 한번으로 전세계 각종 진귀한 영상이나 음악 등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해외 문화나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발품을 팔아야만 했는데, 이태원동이나 청계천은 당시 밀수로 해외의 희귀한 음반과 영상을 구할 수 있는 통로였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이태원에서 해외음악을 접하며 꿈을 키웠다고 했는데,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고급정보였다. 지금이야 일본 문화 개방으로 합법적으로 수입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기에 평범한 일본 연예인들에 대한 정보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당시 부산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 전파가 잡히기도 해서 그것만 봐도 마치 한국에서 북한 방송을 보는 듯한 문화충격 같은 느낌이었는데, 청계천에서는 일본의 성인물까지도 보따리 상인들이 어떻게든 들여와 거액으로 거래를 하기도 했다.

조악한 흑백폰을 쓰던 때의 청계천에서는 조그마한 휴대용 흑백 TV를 비싸게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런 휴대용 TV가 있으면 산에서도 TV를 볼 수 있겠다"며 갖고 싶어 했다. 지상파 정도만 수신되고 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탁상용 시계 정도의 크기이나, 배낭에 넣을 수는 있으니 TV를 가방 안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단 사실만으로 파격적인 '첨단'제품처럼 선망하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TV를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숨을 쉬듯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청계천 시절에는 상상만으로 가능한 꿈의 기계였다. 당시 청계천에선 흑백 휴대용 게임기(게임보이)도 비싸게 팔렸고, 해외에서 밀수된 사진기도 비싸게 팔렸는데, 그 시절에 그런 것들을 소유했다는 것은 나름의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환상의 느낌이었던 청계천이 개발로 인해 사라져서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있으나, 과거에야 해외에서 몰래 들여온 진귀품을 파는 보따리 상인들의 집결지란 것만으로 희소성이 있었어도 클릭 한번으로 집에서 해외품을 받아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상 설사 인위적으로 몰아내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시장에서 도태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엔 만물백화점 같은 곳으로서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과거 청계천을 계속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장소로 남아있다.

복원[편집]

청계천 복원 사업[편집]

1990년대에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1일에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억3900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하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이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다.

청계천 재복원사업[편집]

2013년 서울시는 2014년부터 2050년까지 장기적으로 청계천을 재복원한다는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14년~2018년까지의 단기, 2019~2030년까지의 중기, 2031~2050까지의 장기계획으로 나뉘어 있다.

단기적으로 2018년까지 청계천의 보(湺)를 철거, 직선화 되어있는 청계천 물길의 곡선화, 인공 구조물 구간에 수림대를 조성하여 옛 청계천 수목과 비슷한 나무를 심어 자연에 가까운 하안(河岸)을 유도해나갈 계획이며, 수표교를 원위치에 돌려놓기 위해 안전진단과 부지매입을 실시하겠다고 한다. (수표교는 1955년 복개공사 당시부터 이전해 장충단공원에 보관되어있다.) 2050년까지 수표교, 광통교, 오관수문 재복원과 백운동천, 중학천 같은 옛 물길을 되살려서 청계천에 연결시켜 물 공급을 안정화시키고 보행자 우선가로와 주변 시설 정비를 끝으로 이 계획은 완료된다.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은 복원공사 초기 때부터 지적되어왔던 역사성의 부재와 생태 문제, 유지비 문제 등을 일정 부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청계천의 수원이 되는 하천 모두가 현재 건천이므로, (복개한 위에 도로와 집이 들어섰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무시하고) 복개한 것을 까내고 나무 심고 흙 뿌려 정비한다고 해도 자연 상태로 청계천에 물이 흐르게 만들 방법은 없다. 역사적으로도 "갈수기에 건천-여름에만 흐름-토사가 쌓임- 가끔 홍수에는 범람" 이라는 특성을 지닌 하천인데, 물이 흐르게 만드는 방법은 현재의 한강물+지하철 지하수를 퍼다 붓는 것 뿐이다.

원래 수량이 불안정한 데를 항시 물이 흐르게 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고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 다만 원래 하천이라는 것의 특성상 해마다 물 길은 조금씩 바뀐다. 따라서 하천에 역사를 운운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에 현재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유지하고 있는 하천은 없다고 봐야하고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인간의 효용에 맞게 물길을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공사를 했고 꾸준히 그것을 유지보수해오고 있다.

의의[편집]

당시 청계고가는 지어진지 30년이 넘은 노후된 곳이었고 붕괴위험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 전문가도 있었다. 특히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당시 물길 위에 뚜껑을 덮은 형태로 만들어졌고 주변에서 생긴 오염물질이 쌓이면서 복개내부에 메탄가스가 가득차게 되고 이 가스가 복개내부에 쌓여 터질 위험에 처하자 서울시가 곳곳에 환기구멍을 뚫어 가스를 내보냈으나 이는 임시방편에만 불과했고,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2001년 즈음 미군에서는 청계고가를 지나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지어질 당시에야 종로 등 사대문 안이 서울의 도심이었지만 서울 전체가 발전하고 특히 강남 등 새로운 도심으로 떠오르며 종로 등 구 도심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교통량이 청계고가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점도 제시되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내의 고가도로가 도시를 단절시키고 미관을 해친다는 시민의 의견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고가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철거하는 쪽이 이득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계천 복원사업은 애물단지였던 청계고가를 허물고 복원을 통해 시민들에게 도심 내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새로운 관광명소를 만들었다는 데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실제로 청계천 개장 후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약 1억 9천만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였다.

또한 환경적 측면에서는 바람길을 열어내면서 도심 대기환경을 개선하고 주변부보다 온도를 3도 이상 낮추어 도심의 열섬 현상을 감소 및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자면, 컴퓨터의 수랭 쿨러가 돌아가는 원리를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환경적 영향은 보다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고가도로보다는 나은 결과를 보였다. 또한 이때까지 폭우가 쏟아지면 청계천 일대가 물에 잠기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는데 청계천 정비후 이런 현상이 줄어들었고 이를 청계천이 막아냈다고 한다. 기사에서도 나와있듯이 비가 와서 물이 넘치게 되면 청계천 산책로가 먼저 잠기도록 건설되었다고 한다.

청계천 복원 사업의 가장 직접적인 기대효과는 도심 정비였다. 슬럼화가 진행되고 쇠퇴하기 시작하던 구도심을 청계천을 통해 주위 환경을 개선시켜 다양한 업종의 입지 매력도를 상승시킴으로써 주변 지역의 토지 이용을 다양화시켰다. 지가 역시 상승했으며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효과 역시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수예방에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했다. 과거 종로구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으나 청개천 복원 후 일대의 물이 청계천을 통해 방류되면서 600mm가 넘는 폭우에도 홍수가 일어나지 않아 홍수 예방에 탁월함을 증명하였다.

이외에 다른 도시에서도 도심지 하천 정비가 유행처럼 번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는데, 인구밀도가 희박한 군지역 읍지역이라도 하천만 있으면 국비를 요청해서 정비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방치돼있거나 무허가 개발되던 하천부지를 정비해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리하게 진행하는 탓에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부산의 초량천이며 공사를 할 수록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이 계속 발생하는 바람에 예산이 부족하게 되어 10년 넘게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해외에서는 상당히 좋은 평을 받고 있으며 미국의 도시계획가 제프 스펙은 청계천 복원 사업을 두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도 성공적인 도시 공원의 예로 등장했다. 서울에는 한강이 있지만, 서울 구도심에는 원래 있던 작은 개울들 대부분이.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도 마찬가지. 그렇게 다른 나라의 수도에는 있는 고만고만한 하천이 보이지 않다가 다시 생긴 셈이니 랜드마크가 되었다.

청계천 다리[편집]

청계천 안내도(서울시설공단)

과거의 다리[편집]

조선 시대의 청계천의 다리 목록이다. 백운동천의 신교부터 송기교까지의 다리는 해당 문서에 있다.

  • -: 태평로1가 64번지 부근 광화문우체국 남쪽에 있었으며, 서울지도에 표시만 되어 있고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 모전교(毛廛橋): 지금의 모전교 자리에 있었다. 우전다리(隅廛―) 또는 모교(毛橋)라고도 불렸으며,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한 이후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 하다가 영조 때가 되어서야 모전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모전〔隅廛〕 부근에 있었으므로 모전교라고 하였다. 모전은 각종 과일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큰 길 모퉁이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현재 중구 서린동 무교동 사거리 지점이다.
  • 광통교(廣通橋): 지금의 광교 자리에 있었으며,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 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이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다. 현재 광교네거리 지하에 남아 있다.
  • 장통교(長通橋): 한화빌딩 북쪽, 종로12길 남쪽에 있었다. 장통방(長通坊)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으며, 장창교(長倉橋), 장찻골다리, 장교(長橋)라고도 하였다. 이 다리 서쪽에서 창동천이 합류하여 삼각형 모양의 땅을 이뤘다.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 광제교(廣濟橋): 장교동 20번지 부근에 있었으며, 동국여지비고에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 수표교(水標橋): 1420년(세종 2)에 만들어졌다. 수표를 놓기 전에는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 ; 지금의 종로5가 부근의 마전교와는 별개)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 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 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하랑교(河浪橋): 입정동 6번지 북쪽, 장사동 208번지 남쪽에 있었으며, 이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랑위교(河浪尉橋), 하교(河橋), 화류교(樺榴橋), 화교(花橋) 등으로도 불렸다. 일제 강점기 때 다리의 양 끝을 콘크리트로 개축하였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 때까지 돌다리로 남아 있었다.
  • 신교(新橋): 입정동 201·211번지 북쪽, 장사동 250번지 남쪽, 창덕궁과 남산의 조선신궁(옛 조선총독부)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길 위에 있었다. 1900년대 이후 청계천을 개수하며 콘크리트로 가장 먼저 바뀌었다.
  • 효경교(孝經橋): 장사동 아세아전자상가 남쪽에 있었으며, 영풍교(永豊橋), 소경다리, 새경다리, 효경다리, 효교(孝橋)라고도 하였다. 다리 밑에 거지가 많이 살아 음력 12월에 임금이 거지들을 살폈다고 하며, 영조 때에 금위영 군사들이 한 차례 보수한 뒤 근대에 와서는 다리의 양 끝을 콘크리트로 늘렸다. 청계천 복개 때 철거되었다.
  • 태평교(太平橋): 지금의 마전교 자리에 있었다. 태종 때는 창선방교(彰善坊橋), 성종 때는 태평교라 하였고, 순조 이후로는 태평교와 마전교 이름을 혼용하였다. 오교(午橋), 오굣다리라고도 불렸으며, 다리 부근에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다리이다. 1907년 일제가 오간수문을 헐어버린 뒤로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 영도교(永渡橋): 조선 성종 때 승려가 놓았다고 전한다. 영미교(永尾橋), 영이별교(永離別橋), 영영교(永永橋)라고도 불렸다.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현재의 다리[편집]

조선시대의 다리를 계승한 경우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

  • 모전교: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광통교: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 세월교: 광교와 광통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이다.
  • 광교: 조선시대 광통교 터에 위치하며, 주황색으로 칠해졌다. 우정국로와 남대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장통교: 도보 전용 다리로, 조선 시대의 장통교를 계승했으나 제대로 복원되지는 않았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관철교였다.
  • 삼일교: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철제 다리이다. 하지만 기존의 수표교를 청계천으로 다시 옮겨오는 데에 문제가 많아 계속 사용된다.
  • 관수교: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세운교: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 배오개다리: 옛날 배나무가 심어져 있어 이름이 유래된 배오개(배고개)가 인근에 있어 그 이름을 땄다. 창경궁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배오개교였다.
  • 새벽다리: 옛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였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이른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름을 지었다.
  • 마전교: 부근에 우마를 팔고사는 마전이 조선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였다. 동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창선방교였다.
  • 나래교: 평화시장 앞에 위치한 다리로, 나비의 힘찬 날개짓을 형상화 해서 동대문 의류 상권이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1교였다.
  • 전태일다리(버들다리): 청계천에 자라는 버들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이 다리 근처에서 분신하여 노동권 보장에 헌신한 전태일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2012년 11월 1일부터 명칭을 병용하고 있다.
  • 오간수교: 조선시대에 있던 오간수문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율곡로와 장충단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맑은내다리: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주기 위해 나비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어졌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2교였다.
  • 다산교: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지봉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푸른내다리였다.
  • 영도교: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이다.
  • 황학교: 황학동에 위치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 비우당교: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류관의 집인 비우당(庇雨堂)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하정로와 마장로19길을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비우교였다.
  • 무학교: 무학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무학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 두물다리: 정릉천이 청계천과 만나는 데서 이름을 지었으며,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뤘다.
  • 고산자교: 고산자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고산자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 신답철교: 중앙선의 철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장동철교, 청계천 복개 당시에는 마장철교로도 불렸다.
  • 제2마장교: 마장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마장역과 신답역이 있다.
  • 사근인도교: 용답역의 2번 출구로, 청계천 건너의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 세월교: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자전거와 보도용 다리이다. (상류의 세월교와는 다르다.)

서울 청계천 유적[편집]

서울 청계천 유적은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이 있던 터와, 광통교, 하랑교, 효경교, 오간수문, 양안석축 등의 유구 일체를 의미한다. 발굴 이후 10년 넘게 중랑물재생센터(옛 중랑하수처리장)에 방치되고 있다

조형 설치물[편집]

분수 총 12개
  • 벽천분수(6개소) : 청계폭포, 삼각동워터스크린, 옥류천, 세운폭포, 오간수문, 리듬벽천
  • 고사분수(4개소) : 시점부, 세운교, 오간수교, 청혼의벽
  • 터널분수(1개소) : 비우당교
  • 광교 디지털캔버스 안개분수(1개소)
진입로 총 57개소
  • 계단형 36개소
  • 경사로 19개소
  • 엘리베이터 2개소
청계천 시설물 운영시간 안내
  • 1월 1일 ~ 12월 31일 : 청계폭포 24시간 상시가동
  • 3월 1일 ~ 11월 30일 : 디지털 캔버스 19:00 ~21:00 (매 30분에 8분 가동, 22분 휴식 / 일 5회가동 (5월 ~ 9월은 20:00 ~ 22:00 가동))
  • 4월 1일 ~ 11월 15일 : 시작점 분수 09:00 ~ 21:00 (매시간 50분 가동, 10분 휴식)
  • 4월 1일 ~ 10월 31일 : 삼각동 워터스크린 24시간 상시가동
  • 5월 1일 ~ 9월 30일 : 세운교 고사분수,옥류천,오간수교 프로그램 분수,오간수문 09:00 ~ 21:00 (매시간 50분 가동, 10분 휴식 / 피크시간대 휴식 11:00 ~ 12:00, 14:00 ~ 17:00)

청계천 볼거리[편집]

추억의판잣집

청계천 복원 전이었던 1960~70년 당시 청계천변 판잣집을 재현하여 당시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조명한 문화·역사 체험 장소로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 생활상을 재현한 역사갤러리와 잡화점 · 만화가게 · 연탄가게 등의 풍경을 재현한 생활상체험, 학창시절 교복을 입어 볼수 있는 체험 코너가 있다.

  • 판잣집 테마존
  • 운영기간 : 연중 10:00~18:00 운영(매주 월요일 휴관)
  • 위 치 : 청계천박물관 앞 (청계 9가)
  • 전시내용 : 추억의 교실, 구멍가게, 만화가게, 연탄가게, 공부방, 학창시절 체험(교복) 등
디지털 가든

IT산업의 모태이자 조명의 거리인 청계천의 특성을 고려한 시설운영으로 첨단 디지털 기술과 빛의 예술적인 조화를 통한 다양한 장르의 볼거리 제공으로 방문 시민 만족도 향상

  • 위치 : 청계천 광교 하류
  • 작가 : 미구엘슈발리에 (국적 : 멕시코)
  • 운영시간
  • - 3~4월 / 10~11월 : 19:10, 20:10, 21:10
  • - 5~9월 : 20:10, 21:10, 22:10
  • - 12~2월 : 18:10, 19:10, 20:10
  • 20분간 연출
디지털 캔버스

레이저와 안개분수를 활용하여 빛의 색감과 속도의 변화로 새로운 이미지 영상을 연출하여 시민들에게 볼거리 제공

  • 위치 : 청계천 광교 상류
  • 운영시간
  • - 3~4월 / 10~11월 : 19:00, 19:30, 20:00, 20:30, 21:00
  • - 5~9월 : 20:00, 20:30, 21:00, 21:30
  • - 12~2월 : 미가동
  • 8분간 연출
청혼의 벽

청혼의 벽이 위치한 청계천 두물다리는 두 물길(성북천, 정릉천)이 청계천과 합류하는 "만남"의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다리모양도 두 물길이 만나는 모양을 형상화 하였다. 두 개의 물길이 만나 하나가 되는 청혼의 벽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보세요.

  • 운영기간 : 연중
  • 운영내용 : 시민 누구나 자유롭게 프로포즈를 할 수 있도록, 조명·분수를 매일 밤 일정시간 가동
  • 조명·분수 가동시간 : 3월~11월(매일 19:00~21:00)

주변관광안내[편집]

청계천으로 인해 서울시는 인간 중심의 환경도시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365일 다양한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는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조형물과 주변 관광지를 연계시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이다.

을지로 방향
  • 덕수궁(청계광장에서 1km시청건너편)

성종이 형 월산대군의 집으로 270년간 행궁과 별궁으로 사용, 고종이 순종에게 향위한 후에도 이곳에 거처해 이때부터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 다동 음식문화 특화거리(광통교, 광교, 장통교에서 50m 이내)

중구청이 지정한 음식특화 거리는 좁은 골목에 낚지집, 해장국집, 추어탕집, 냉면집 등이 많아 중구청이 음식문화 특화거리로 지정된 곳이다.

  • 청계천변 헌책방거리(오간수교 청계천변 약 150m 구간)

청계천로를 따라 50여년 전통의 서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던 청계천변 헌책방 거리, 평화시장쪽에 50여개 서점들만이 들어 있다.

  •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오간수교에서 50m 이내)

DDP는 전세계 디자인 지식과 정보가 발생하고, 모이고, 전파되는 세계 디자인의 허브가 될 것입니다. DDP 건립을 계기로 현재의 취약한 디자인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디자이너 및 디자인전문기업 창작 및 마케팅 역량을 극대화하여 디자인 산업의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기반을 이뤄 DDP는 디자인 산업의 세계적 메카가 되었다.

  • 청계천 박물관(두물다리에서 50m 이내)

청계천의 역사적 여정이 주제별로 전시된 상설 전시실은 복원되기 이전의 청계천의 모습부터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진행되었던 복원공사 청계천 복원 이후의 도시 변화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종로 방향
  • 인사동(삼일교에서 1km 낙원상가 옆)

골동품, 고미술품점, 전통찻집과 전통주, 오래된 책방과 엿장수 가위소리가 있어서 옛 장터를 연상시키는 인사동은 살아있는 거리의 박물관으로 전통과 현대문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 세운상가(세운교에서 50m 이내)

'세계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의 세운상가, 종묘 앞으로부터 청계천로와 을지로, 퇴계로에 이르는 길이 1km의 남북축선으로 도열한 곳으로 녹지공원으로 조성하여 도심속의 숲속을 향유하는 보행자의 천국이 될 것이다.

  •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오간수교에서 50m 이내)

동대문이 변하면 서울도 변한다. 세계적인 의류상권, 동대문 시장, 과거부터 작은 난전이었던 동대문 시장이 세계적인 시장으로 성장해 있다. 민족의 통일 염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성된다.

  • 서울 풍물시장(황학교에서 50m 이내)

우리 고유의 전통과 멋이 담긴 풍물의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 등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풍물 한마당을 여러분께 선보입니다.

  • 서울 약령시장(고산자교에서 200m 이내)

우리나라 한방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이 남아있는 곳 서울약령시장 많은 전통시장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그 역사와 전통이 가장 긴 곳이 제기동에 위치한 서울 약령시장 한약재시장 경동시장이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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